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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선 속초시장은 2일 오후 2시 시청 상황실에서 열리는 도시생태지도 용역 진행 보고회에 참석.
중학교 추첨…“우리는 왜 뺑뺑이를 돌렸을까?”
원하는 중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시험을 봐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으로 부터 55년 전인 1968년까지 그랬다. 당시에는 이른바 명문으로 분류되는 중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 현재의 수능시험과 같은 입학시험을 좋은 성적으로 통과해야만 했다. 자유학기제가 도입되고 중학교 2학년이 돼야만 정식 시험을 치르는 요즘과 비교하면 딴 나라 얘기 같지만 그땐 그랬다. 당시에도 ‘입시지옥’이니 ‘지옥문’이니 하는 그런 말들이 심심치 않게 쓰였는데, 오히려 대입 학력고사가 아닌 중학교 시험의 살벌함을 비유할 때 많이 등장하곤 했다. 이제 세상을 10년하고 조금 더 산 아이들에게는 가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신문을 살펴보면 그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다.“입시지옥으로 요약되는 중학입학 시즌이 눈 앞에 다가왔다. 수험생들은 비좁은 입시지옥문이 도사리고 있는 도시의 유명교로만 불개미떼처럼 달려붙는다. 극한 경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순간 어린이들에게선 동심이 사라진다. 사진선다형과 OX문제가 가득차 있는 시험지를 앞에 놓고 꼬마들의 머리는 자동퀴즈기로 변해버린다. 부모들의 채찍질하는 눈초리를 의식하며 시험장에 앉은 어린이들의 마음은 불안과 긴장과 초조가 뒤범벅. 낙방의 고배를 마신 어린이들은 극도의 열등감과 …”(경향신문 1966년 11월30일자 기획기사 ‘입시지옥 20년 ① 中)이처럼 입시경쟁이 과열되면서 ‘열세살’짜리 재수생이 생겨나는 웃지 못할 상황까지 벌어진다. 1960년대 문교부(현재의 교육부) 자료에 따르면 한 해 2만명 정도의 ‘중입’ 재수생이 생겨났다고 하는데, 인생 초반에 세상 쓴맛 한번 제대로 본 당시 국민학생(초등학생)들의 처지가 그저 측은할 따름이다. 아이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기 위한 ‘치맛바람’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일류 중학교에 시험을 쳤다 떨어진 한 학생은 빚까지 내가며 가정교사를 두고 과외를 받던 중 부모의 과도한 기대에 부담감을 느껴 시험 일주일을 앞두고 정신이상 진단을 받았고, 이에 충격을 받은 부모도 증세를 보여 나란히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어이없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또 시험에 떨어진 아이들이 가출소동을 벌이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일까지 생겨 나면서 심각한 사회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특히 때이른 입시에 내몰린 우리 아이들의 체형까지 일본의 또래들과 비교해 왜소해지고 있다는 내용까지 중학교 시험으로 인한 폐해의 사례들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문제 해결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는 널리 퍼져 나갔다. 하지만 이러한 지적에도 중학교 입학시험제도는 좀처럼 바뀔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해결의 실마리는 의외의 사건에서 시작된다. 바로 그 유명한 ‘무즙파동’과 ‘창칼파동’이 그것이다. 먼저 ‘무즙파동’은 1964년 서울의 한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엿을 만들때 엿기름 대신 넣을 수 있는 것’을 묻는 문제가 나오면서 촉발됐다. 정답의 예로 (1)디아스타제 (2)꿀 (3)녹말 (4)무즙이 제시됐다. 정답은 (1)번 ‘디아스타제’. 하지만 학부모들은 무즙에도 디아스타제가 들어있다면서 강력하게 반발하고, 이때부터 교육당국의 갈팡질팡 행보에 학부모들의 의견이 갈리면서 공방이 이어진다. 문제 자체를 무효화 했다가 반발이 심해지자 다시 디아스타제만 인정한다고 밝히지만 이듬해 희대의 ‘무즙재판’으로 이어지면서 법정 공방 끝에 무즙도 정답으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그런데 또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이미 입학정원을 다 채운 해당 중학교가 추가 입학이 불가할 수도 있다는 입장을 내놓은 것. 하지만 이러한 규정도 학부모들의 극렬한 항의를 이길 수 없었고, 결국 전원합격으로 마무리 된다. 1967년 ‘창칼파동’도 시험문제가 문제였다. 질문은 ‘목판화를 새길 때 창칼을 바르게 쓴 그림은?’이었고, 이 역시도 복수정답 시비에 휘말리게 된다. 무즙파동 때 이미 한차례 학습이 된 학부모들은 역시 소송을 제기한다. 그 수가 무려 549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패소하고 만다.이처럼 불필요한 갈등들이 계속해서 생겨나자 1968년 7월 문교부는 1969년부터 1971년까지 3개년 계획으로 중학교 입학시험제를 폐지하는 대신 입학추첨제를 실시하는 내용을 담은 ‘중학교 무시험 진학제도’를 발표한다. 이 제도는 1969년 서울에서 처음 실시되고, 1971년부터 전국으로 확대된다. 사진 ①은 바로 중합교 입학시험이 사라지고 추첨제가 처음 실시된 1971년 강원도내의 중학교 진학 추첨장 모습이다. 시험 스트레스에서 해방된 아이들의 모습이 편안해 보이기도 하지만 은행알에 운명(?)을 걸어야 하는 또다른 입장에 서 있어서인지 긴장한 모습도 역력하다. 사진 ②는 입학추첨제를 실시한지 3년차 되는 해라는 점에서 추첨장의 꾸밈새가 비교적 짜임새를 갖춘 모습이다. 그래도 나무로 된 추첨기를 돌리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아이들의 표정에는 여전히 긴장감이 흐른다. 추첨기 사용 방법은 이랬다. 오른쪽으로 두번 돌리고, 왼쪽으로 한번 돌려서 떨어지는 은행알로 학교를 배정받는 것이다. 이 수동식 추첨기를 ‘뺑뺑이’라고 불렀고, 추첨하는 모습을 “뺑뺑이 돌린다”고 표현했다고 한다. 그래서 ‘평준화’라는 온전한 단어를 두고 ‘뺑뺑이’라는 표현을 우리는 얼마 전까지도 사용했었다. ‘뺑뺑이 세대’의 탄생은 그렇게 이뤄졌다.
솟아오른 바위에 상상을 더하면 거인·코끼리·양머리가 눈앞에
동해추암은 동해물과 백두산이 시작되는 애국가의 첫 소절의 시작 배경하면하면 떠오르는 장면이다. 조선시대 능파대로 불리던 곳으로 는지는 강원도내에 두 곳이 있다. 동해 능파대와 고성 문암항 주변 능파대다. 능파대가 언제 추암으로 바꿨는지는 정호가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동해시가 삼척시에서 분리되던 1980년 즈임일 것으로 추측된다.한국의 석림 능파대 안내판은 "능파대는 인근의 하천과 피랑에 의해 운반된 모래가 쌓여 육지와 연결된 육계도(죽도) 및 촛대바위 같은 암석기둥(라피에)들을 포함한 지역을 총칭한다"고 적고 있다.촛대바위는 물과 바람 그리고 시간 등의 침식작용으로 만들어진 지형으로 고등학교 한국지리 교과서에 수록될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촛대바위 주변은 보는 사람의 상상력이 더해지면 잠자는 거인, 코끼리, 양머리 등 다양한 모양을 볼 수 있다.추암 입구에 해암정이 단아하게 세워져 있다. 해암정은 1979년 5월 30일 강원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삼척심씨(三陟沈氏)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고려 공민왕 10년 삼척심씨의 시조 심동로(沈東老)가 낙향하여 건립한 정자로 알려져 있다. 심동로의 자는 한(漢)이요, 호는 신제(信齊)로 어려서부터 글을 잘하여 한림원사(翰林院使) 등을 역임했다. 고려 말의 혼란한 국정을 중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자 왕이 이를 만류하다가 동로( 東老:노인이 동쪽으로 간다는 뜻)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낙향한 이후 후학의 양성과 풍월로 세월을 보냈다. 왕은 다시 그를 진주군(眞珠君)으로 봉하고 삼척부를 식읍(食邑)으로 하사했다. 지금의 해암정(海岩亭)은 본래 건물이 소실된 후 조선 중종 25년(1530)에 어촌(漁村)심언광(沈彦光)이 중건하고, 정조 18년(1794) 다시 중수한 것이다. 건물은 낮은 1단의 석축 기단 위에 세운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얹은 정자 형식이다. 4면 모두 기둥만 있고 벽면은 없다. 뒤로 지붕보다 조금 높은 바위산이 있어 운치를 더해 주며, 이곳에서 보는 일출은 장관이다.지난 2019년 6월 설치한 출렁다리는 바다 위를 걷는 느낌을 준다. 길이 72m, 폭 2.5mㅇ의 다리는 돌과 바다 위를 하늘에서 조망하게 만들어 짜릿한 쾌감을 선사한다.출렁다리 위에서 바라본 풍경은 여행의 품격을 높여주기도 한다. 능파대와 해암정이 한눈에 들어와 눈맛을 말깔나게 해준다. 아담한 크기의 추암 해변도 그림 속의 장면처럼 정겹게 다가온다.지금은 추암 해변 주변으로 횟집, 오토캠핌장, 편의점들이 한 줄서기를 하고 있지만 1970년대는 작은 집들이 드문드문 서 있었다. 능파대 언덕 위엔 소나무들이 손 가락으로 셀 만큼의 숫자 만 보인다. 그 앞으로 초가집과 슬레이트, 기와집 6채 정도가 보인다. 허리 보나 높을 듯 말 듯한 담장도 친근해 보인다. 담장 너머로 안살림이 다 보인다. 바다로 향하는 방향엔 바위 들이 성난 파도처럼 자신의 존재감을 드리 내고 있다. 그 사이 빨래하는 아낙이 앉은 자세로 바쁜 손을 놀리고 있다. 멀찍이 한 아이가 떨어져 서서 아낙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 모자 사이로 보기엔 거리가 넘 멀어 친근감이 없어 보인다. 현대식 건물은 사람의 시선을 억눌러 잠깐만 보아도 불편해지곤 한다. 그러나 옛 풍경은 시선을 거슬리는 건물이 없어 눈만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준다. 김남덕 부국장
강원산간 화전민 고단한 삶 보듬던 유일한 보금자리
‘너와집’을 아시나요?너와집은 강원도 산간지대 등에 오랫동안 전해 내려온 전통적인 가옥 형태다.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로 인한 지붕개량 사업 등의 여파로 사라지면서 이제는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게 됐다. 다만 삼척 신리와 대이리에 있는 너와집이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기와집’이나 ‘초가집’, 삼의 속대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올린 ‘저릅집’과 같이 지붕의 재료로 가옥의 이름을 정하는 것 처럼 너와집도 ‘너와’를 주재료로 해 지붕을 얹은 집을 말 한다. ‘너와’는 지붕을 올릴 때 기와처럼 쓰는 돌 조각이나 나뭇조각을 말한다. 강원도 산간지대에서는 주로 붉은 소나무(赤松·적송) 널쭉을 활용한 ‘너와집’이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고단한 몸을 누일 수 있는 유일한 보금자리였다.너와집은 방을 두줄로 배치한 ‘겹집’ 형태로 지어졌는데, 폐쇄적인 구조를 갖고 있지만 겨울이 길고 추운 강원도에 유리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강원도 이외에도 울릉도와 북한의 함경도, 평안도 등에서 주로 나타난다. 강원도 산간지대에는 1930년대 부터 너와의 채취가 어려워지면서 참나무 껍질을 지붕으로 활용한 ‘굴피집’ 등이 함께 성행하기도 했다. 정선에는 정선 산기슭에서 채취한 청석맥을 얇은 판석 형태로 재단해 지붕을 덮어 올린 돌집(돌너와집)도 있었다.이렇게 그 당시의 삶을 영위한 사람들의 사는 형편들은 지붕의 재료로 가늠해 볼 수 있었다. 그 험하다는 강원도의 첩첩산중에서 기와를 구하는 일은 ‘언감생심’이고, 초가집의 재료인 짚이나 갈대 따위를 얻는 일도 쉽지 않았으니, 자연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소나무 조각이나 참나무 껍질이 지붕 재료로 낙점 받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너와집이나, 굴피집은 인적이 드문 강원도 산골로 흘러 들어온 우리 민초들의 팍팍했던 삶이 스며들고 또 자연스레 기록된 손때 묻은 흑백의 증명사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오늘의 주인공인 강원도 그중에서도 삼척시 신기면 대이리(사진)는 삼척시 도계읍 신리와 함께 ‘화전(火田)’ 이 성행했던 마을이었다.이 산골에서 너와집은 화전민의 안식처 역할을 한 곳이었다. 사진①이 포착한 신기면 대이리의 너와집과 고즈넉한 주변 풍경을 보면 집 뒤편으로 하늘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산이 둘러쳐져 있어 얼마나 오지인지를 쉽게 가늠해 볼 수 있다. 사진②는 너와집 아래 계곡 방향으로 마을이 형성된 것을 볼 수 있는데 다른 집들은 대부분 함석으로 지붕을 바꾼 모습을 보이고 있다. 너와집 담벼락 앞으로 취재차량으로 보이는 짚차의 모습도 이채롭게 담겨 있다.화전민들이 언제 처음 이 곳에 정책해 삶의 터전을 꾸렸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문화재청 자료와 신문기사 등에 따르면 한 화전민의 조상과 그 가족들이 인조14년 병자호란(1636년) 당시 화를 피해 경기도 포천에서 피난처를 찾아 이곳으로 이주했다고 하니 수백년의 역사를 품고 있는 유서 깊은 마을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너와집은 1973년부터 1979년까지 정부가 국토의 황폐화 방지와 화전민의 생활 안정, 산림자원 조성 등을 위해 화전금지를 골자로 한 ‘화전정리사업’을 진행하면서 자연스럽게 모습을 감추기 시작한다. 당시 화전 정리지구를 설정해 경작을 금지시키고 화전민들에게 이주를 통고하면서 취업알선 등 생계 대책까지 세워줬다(동아일보 1973년 11월30일 보도)고 하니 조치는 상당히 강력했던 것으로 보인다.1978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강원도 순시에 나선 자리에서 “강원도에 화전이 다시 생기고 있다”며 철저한 단속과 함께 화전민에 대한 지원방법까지 강구하라고 지시한 신문기사(매일경제신문 1978년 3월10일)의 내용도 있어 수년에 걸친 고강도의 화전 정리 정책으로 화전민들이 터전을 버리고 산을 내려오는 일은 불가피한 일이 됐다.그나마 끝까지 너와집을 지키던 이들도 지붕을 보수할 때 필요한 나무를 구할 길이 없어 하산을 택해야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너와집은 빈집이 된 채 폐가로 변하면서 자연스럽게 역사의 뒤안길로 그 모습을 감추게 됐다. 그렇게 여름에는 시원했고, 겨울에는 외풍없이 따뜻했던 삼척 대이리와 신리 화전민의 그 시절 보금자리는 이제 단 두채만이 ‘국가민속문화재’로 남아 우리 곁을 지키고 있다.
‘이웃 힘모아 골목 살린다’…골목상인에 주차장 내준 원룸 건물주들
골목상인들과 주민들의 합의를 통해 낮시간대 원룸주차장을 개방, 골목상권을 살리고 주차난을 해결하기 위한 실험 ‘공유 주차장 조성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춘천 후평동 상인들은 골목을 살리자는 취지에 공감한 원룸 건물주들의 동참으로 8개 주차면을 확보했다. 춘천사회혁신센터와 후평동 상인·주민들은 주차공간 공유와 주차 통계 수집을 위한 센서를 설치하는 등 운영준비를 마쳤다. 최근 후평1동 20통에서 원룸을 운영 중인 건물주 3명은 골목상인들로 구성된 후평동뒤뜰팀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다. 주차장 공유로 상권을 살릴 수 있다는 실험 목적과 낮 시간대에만 주차장을 공유해 세입자들의 불편을 최소화한다는 설득에 동의한 것이다. 원룸 사장인 이윤희씨는 “골목에 함께사는 주민들이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다는 취지가 이웃 간에 정이 있던 과거를 떠올리게 해 주차장 개방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주민들의 협조로 주차면을 확보하자 실험은 일사천리로 속도를 냈다. 후평동뛰뜰팀은 지난달 17일 원룸의 공유주차장에 센서 설치 공사를 진행했다. 센서를 통해 이용자가 주차 가능 여부를 앱으로 확인할 수 있고 몇 대의 차량이, 언제, 얼마나 공유주차장을 사용했는지 정보를 수집할 수 있다. 센서 설치를 맡은 파킹프렌즈 관계자는 “주차 통계를 수집하고 어플을 통해 해당 주차공간의 실시간 사용여부도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날 후평동에는 실험참여에 동의한 원룸 3곳과 비어있는 마당 주차장을 내어준 주택 1곳을 포함, 총 8개 면에 센서가 설치됐다. 원룸에는 공유주차장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붙었다. 주차공간을 공유해준 원룸 이름과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만 이용이 가능하다는 안내 등이 담겼다. 센서가 부착된 주차면만 이용해달라는 문구와 장기주차 금지, 연락처 메모 등 배려를 요청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실험 시작을 앞두고 강원일보 취재진은 김지영 후평동뒤뜰팀 대표(살루떼베이커리 대표)와 함께 센서, 표지판 설치까지 끝난 공유주차장을 둘러봤다. 마침 인근 상가에서 나오던 손님들이 표지판을 발견하고 호기심을 보였다. 표지판 내용을 찬찬히 읽던 손님들이 “다음부턴 식당에 올 때 주차가 좀 더 쉬워지겠다”는 반응을 보이자 김 대표는 뿌듯함을 감추지 못했다. 김지영 후평동뒤뜰팀 대표는 “수 년째 골머리를 앓던 주차문제가 주민들의 소통과 합의로 해결의 실마리를 보이기 시작했다"며 "일회성에 그치는 것이 아닌 이용자, 제공자 양 측에서 불편사항을 모니터링하고 개선해 공유주차장을 늘려가는 것이 최종 목표”라고 했다. 후평1동 공유주차장은 모든 준비를 끝내고 이달부터 시범 운영을 시작한다. 후평1동 19·20통 일대 상가를 방문하는 손님이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강원일보는 향후 시범운영을 통한 주차장 공유 실험의 결과를 소개할 예정이다.
전국 최초 ‘폐지 수거용 전문 리어카’ 만든다…성공 가능성은?
폐지 수거 노인들을 위해 보다 안전한 리어카를 만드는 사회적 실험 ‘리어카 프로젝트’를 진행중인 춘천사회혁신센터와 강원일보는 어르신들과 함께 시내 곳곳을 동행하며 수집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제작에 들어갔다.리어카 제작은 이번 프로젝트의 취지에 공감한 한국폴리텍Ⅲ대학 춘천2캠퍼스에서 맡아주기로 했다.지난 20일 찾은 한국폴리텍Ⅲ대학 춘천2캠퍼스 자동차공학관에서는 대학 교수 등 10여명이 자원재생활동 리어카의 프로토타입을 만드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춘천사회혁신센터와 강원일보 취재진,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한 시민들이 실제 폐지 수집에 종사하는 어르신들과 동행하며 수집한 데이터와 토론을 통해 머릿 속에 스케치, 구상만 했던 리어카가 눈앞에서 실제로 만들어지는 중이었다.이번 프로젝트를 위해 정호선 산업디자인과 교수를 비롯해 이강복·양승복 자동차과 교수, 김영수·임태훈·장명수 산업설비과 교수, 정배용 교양교수 등이 팔을 걷고 나섰다. 지역 주민이 공정 과정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한국폴리텍Ⅲ대학이 구축한 ‘러닝팩토리 융복합 실습센터’ 의 교수진이 모두 참여한 것이다.‘자원재생활동 전문 리어카’는 기존 리어카의 무게를 줄이고 안전한 작업을 돕도록 하는데 초점이 맞춰졌다.우선 리어카의 폐지 받침대 역할을 수행할 ‘판넬’은 산업디자인과에서 제작을 맡았다. 리어카의 앞면, 옆면은 가볍고 튼튼한 목조 판넬로 무게를 줄였다. 바닥면의 경우 기존의 나무판자 대신 메쉬망을 설치했다. 빗물 등에 폐지가 젖는 것을 막고 매일 반복되는 작업으로 인한 리어카 본체의 훼손도 최소화하기로 했다.앞서 강원일보 취재진의 폐지 수집 동행 과정에서 리어카 위로 쌓이면서 폐지가 쏟아지거나 시야를 가려 사고 위험에 놓인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리어카 전면부에는 각도를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는 경첩 방식의 판넬이 설치된다. 판넬설치는 산업설비과에서 맡았다.또 어두운 골목에서 리어카가 운전자 등에게 잘 발견되지 않아 사고로 이어지는 일을 막기 위해 자동차과에서는 리어카 전체에 밝고 시인성이 높은 주황색 도색·도장 작업을 했다.무게도 대폭 줄였다. 기존 리어카는 50~60㎏ 가량이었으나 새로 제작되는 리어카는 40㎏ 정도에 불과하다. 반대로 견고함은 더욱 강해져 몸무게 70㎏ 후반인 강원일보 기자가 직접 리어카에 올라타 여러 번 뛰어도 리어카는 꿈쩍도 하지 않을 정도로 튼튼했다.정호선 한국폴리텍Ⅲ대학 산업디자인과 교수는 “리어카 프로젝트는 한국폴리텍3대학 춘천2캠퍼스 교수진들의 기술로 사회적 약자를 도울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라며 “기존 리어카를 사용해온 어르신들이 익숙함을 느낄 수 있는 모델을 만드는데 주력했고 실용성과 내구도를 모두 갖춘 리어카를 제작해낼 것”이라고 각오를 밝혔다.박광우 춘천사회혁신센터 리어카 프로젝트원은 “추후 프로젝트원들이 자원순환활동가들과 함께 제작 완료된 리어카 프로토타입을 거리로 직접 끌고 폐지를 수거하면서 보완점을 찾아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점자 오류 개선 위해 시각장애인들이 나선다
‘점자’는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한글이다. 그래서 1926년 국내에서 처음 창안한 한글점자를 ‘훈맹정음(訓盲正音)’이라고 부른다.시각장애인이면 모두 점자를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국내에서 점자를 사용하는 시각장애인은 9% 정도에 불과한 실정이다. 시각장애인 중 10명 중 9명은 점자를 모르는 것이다.문화체육관광부 국립국어원에서 2020년에 마지막으로 개정한 한국 점자 표준안이 존재하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점자는 여전히 오류가 많은 실정이다. 이로 인해 오로지 점자에 의존하는 시각장애인에게 잘못된 정보를 전달해 위기상황에 빠뜨리기도 한다.점자 자체가 어렵고 표준안도 없는데다 후천적 시각장애인 등에 대한 교육도 거의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점자를 알리 없는 일반인들은 이같은 문제를 인식할 수 조차 없다. 시각장애인 위주로 구성된 ‘스토리加(가):우리들의 이상한 이야기 모음’ 팀은 ‘점자가 알려준 세상은 과연 안전할까?, 시각장애인이 직접 잘못된 점자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는 문제의식을 갖고 출발했다.이들은 춘천사회혁신센터의 지원을 받아 점자교육을 받고 춘천의 공공기관과 다중이용시설 등을 찾아 점자를 읽어보고 오류나 문제점을 찾아낸다. 무심코 지나쳤던 점자를 일일이 읽으며 일반 시민과 시각장애인이 모두 안전한 새로운 점자 시스템의 도입방안을 모색하는 것이다.강원일보는 스토리加 팀원들과 함께 점자를 배우고 이들의 현장 실험에 동참해 우리가 몰랐던 점자의 문제를 찾아낼 방침이다.윤효주 춘천사회혁신센터 지역협력팀장은 “점자 실험 프로젝트는 장애당사자와 비장애당사자가 함께 일상의 이동데이터를 통해 점자의 문제점을 모으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며 “시각장애인들이 겪는 구체적인 문제와 필요를 실험을 통해 모두가 공감하고 개선해 모두에게 안전한 도시를 만드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이번 프로젝트의 목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