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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반

[타임머신 여행 라떼는 말이야]강원산간 화전민 고단한 삶 보듬던 유일한 보금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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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 대이리·신리에 ‘국가민속문화재’ 로 남아있어
화전 성행하던 시절, 화전민 지친 몸 누이던 안식처

◇사진① 삼척시 신기면 대이리의 너와집과 고즈넉한 주변 풍경을 보면 집 뒤편으로 하늘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산이 둘러쳐져 있어 얼마나 오지인지를 쉽게 가늠해 볼 수 있다. 강원일보 DB

‘너와집’을 아시나요?

너와집은 강원도 산간지대 등에 오랫동안 전해 내려온 전통적인 가옥 형태다.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로 인한 지붕개량 사업 등의 여파로 사라지면서 이제는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게 됐다. 다만 삼척 신리와 대이리에 있는 너와집이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기와집’이나 ‘초가집’, 삼의 속대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올린 ‘저릅집’과 같이 지붕의 재료로 가옥의 이름을 정하는 것 처럼 너와집도 ‘너와’를 주재료로 해 지붕을 얹은 집을 말 한다. ‘너와’는 지붕을 올릴 때 기와처럼 쓰는 돌 조각이나 나뭇조각을 말한다. 강원도 산간지대에서는 주로 붉은 소나무(赤松·적송) 널쭉을 활용한 ‘너와집’이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고단한 몸을 누일 수 있는 유일한 보금자리였다.

너와집은 방을 두줄로 배치한 ‘겹집’ 형태로 지어졌는데, 폐쇄적인 구조를 갖고 있지만 겨울이 길고 추운 강원도에 유리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강원도 이외에도 울릉도와 북한의 함경도, 평안도 등에서 주로 나타난다. 강원도 산간지대에는 1930년대 부터 너와의 채취가 어려워지면서 참나무 껍질을 지붕으로 활용한 ‘굴피집’ 등이 함께 성행하기도 했다. 정선에는 정선 산기슭에서 채취한 청석맥을 얇은 판석 형태로 재단해 지붕을 덮어 올린 돌집(돌너와집)도 있었다.

이렇게 그 당시의 삶을 영위한 사람들의 사는 형편들은 지붕의 재료로 가늠해 볼 수 있었다. 그 험하다는 강원도의 첩첩산중에서 기와를 구하는 일은 ‘언감생심’이고, 초가집의 재료인 짚이나 갈대 따위를 얻는 일도 쉽지 않았으니, 자연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소나무 조각이나 참나무 껍질이 지붕 재료로 낙점 받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너와집이나, 굴피집은 인적이 드문 강원도 산골로 흘러 들어온 우리 민초들의 팍팍했던 삶이 스며들고 또 자연스레 기록된 손때 묻은 흑백의 증명사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오늘의 주인공인 강원도 그중에서도 삼척시 신기면 대이리(사진)는 삼척시 도계읍 신리와 함께 ‘화전(火田)’ 이 성행했던 마을이었다.

◇사진② 삼척시 신기면 대이리의 너와집 아래 방향으로 마을이 형성된 것을 볼 수 있는데 다른 집들은 대부분 함석으로 지붕을 바꾼 모습을 보이고 있어 이채롭다. 강원일보DB

이 산골에서 너와집은 화전민의 안식처 역할을 한 곳이었다. 사진①이 포착한 신기면 대이리의 너와집과 고즈넉한 주변 풍경을 보면 집 뒤편으로 하늘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산이 둘러쳐져 있어 얼마나 오지인지를 쉽게 가늠해 볼 수 있다. 사진②는 너와집 아래 계곡 방향으로 마을이 형성된 것을 볼 수 있는데 다른 집들은 대부분 함석으로 지붕을 바꾼 모습을 보이고 있다. 너와집 담벼락 앞으로 취재차량으로 보이는 짚차의 모습도 이채롭게 담겨 있다.

화전민들이 언제 처음 이 곳에 정책해 삶의 터전을 꾸렸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문화재청 자료와 신문기사 등에 따르면 한 화전민의 조상과 그 가족들이 인조14년 병자호란(1636년) 당시 화를 피해 경기도 포천에서 피난처를 찾아 이곳으로 이주했다고 하니 수백년의 역사를 품고 있는 유서 깊은 마을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너와집은 1973년부터 1979년까지 정부가 국토의 황폐화 방지와 화전민의 생활 안정, 산림자원 조성 등을 위해 화전금지를 골자로 한 ‘화전정리사업’을 진행하면서 자연스럽게 모습을 감추기 시작한다. 당시 화전 정리지구를 설정해 경작을 금지시키고 화전민들에게 이주를 통고하면서 취업알선 등 생계 대책까지 세워줬다(동아일보 1973년 11월30일 보도)고 하니 조치는 상당히 강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1978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강원도 순시에 나선 자리에서 “강원도에 화전이 다시 생기고 있다”며 철저한 단속과 함께 화전민에 대한 지원방법까지 강구하라고 지시한 신문기사(매일경제신문 1978년 3월10일)의 내용도 있어 수년에 걸친 고강도의 화전 정리 정책으로 화전민들이 터전을 버리고 산을 내려오는 일은 불가피한 일이 됐다.

그나마 끝까지 너와집을 지키던 이들도 지붕을 보수할 때 필요한 나무를 구할 길이 없어 하산을 택해야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너와집은 빈집이 된 채 폐가로 변하면서 자연스럽게 역사의 뒤안길로 그 모습을 감추게 됐다. 그렇게 여름에는 시원했고, 겨울에는 외풍없이 따뜻했던 삼척 대이리와 신리 화전민의 그 시절 보금자리는 이제 단 두채만이 ‘국가민속문화재’로 남아 우리 곁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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