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사소송의 이념은 ‘실체적 진실 발견’이다. 법원은 당사자의 주장에 구속되지 않고 사안의 진실을 규명하여 객관적 진실을 발견하여야 한다. 예를 들어, 피고인이 범행을 모두 자백하더라도 허위로 자백한다는 의심이 들고 다른 증거만으로도 유죄를 인정하기 부족하다면, 법원은 무죄 판결을 선고하여야 한다.
반면 민사소송은 ‘처분권주의(處分權主義)’와 ‘변론주의(辯論主義)’ 원칙이 적용된다. 사법상의 법률관계는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결정되어 자기책임 아래에서 규율되는 것이 이상적이고, 개인의 권리 행사에는 원칙적으로 국가가 개입하거나 관여하지 않는다는 근대사법의 원칙을 ‘사적자치(私的自治) 원칙’이라고 하는데, 이 원칙이 소송법에서 구현된 것이 처분권주의와 변론주의이다.
처분권주의란 절차의 개시, 심판의 대상, 절차의 종결을 당사자에게 맡기는 원칙을 말한다. 예를 들어, 지인에게 돈을 빌려줬는데 갚지 않는 경우, 지인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지 말지, 빌려준 돈 중 얼마를 갚으라고 청구할지, 소송 도중에 마음이 바뀌어 소를 취하하고 없던 일로 할지 등은 전적으로 당사자 본인이 결정해야할 문제다. 즉 법원은 돈을 변제받을 의향이 없는 사람에게 억지로 소를 제기하게 한다거나, 빌려준 돈의 일부만 변제받으려는 사람에게 전부를 받으라고 판결한다거나, 중간에 소를 취하하려는 사람에게 소송을 계속 진행하라고 강요할 수 없다.
변론주의란 당사자가 권리 발생 및 소멸 등에 관한 주요 사실을 주장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 등 자료를 수집하여 제출할 책임이 있고, 당사자가 수집하여 변론에서 제출한 자료만을 재판의 기초로 삼을 수 있다는 원칙을 말한다. 예를 들어 법관이 우연히 어떤 사고를 목격하거나 전해 들어서 그 경위를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당사자가 그 사고경위에 관한 증거를 제출하지 않으면, 법관은 그 사고경위가 사실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 다만 굳이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있는데, 당사자들 사이에 서로 ‘다투지 않는 사실’이 그것이다. 다투지 않는 사실에 대하여 증명을 요구하는 것은 사적자치가 지배하는 민사소송의 관점에서 무익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매매대금을 전부 지급했다는 원고의 주장에 대하여 피고가 이를 수령했다고 자백한 경우, 법원은 진실인지 여부를 따질 필요 없이 원칙적으로 ‘매매대금이 전부 지급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여야 한다(다만 예외적으로 특정 요건 하에서 당사자가 자백을 취소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작년에 군(郡)법원 재판을 겸임했는데 그 중 상당수가 변호사 등 법률전문가의 도움 없이 ‘나홀로 소송’을 진행하는 소액사건이다 보니, 처분권주의, 변론주의 원칙과 관련하여 고민할 점이 많았다. 소액사건에서는 정돈되지 않은 사실을 늘어놓거나, 어떤 청구를 하는지가 불분명하거나, 주장과 증명이 부실한 상태에서 본인의 억울함만을 읍소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다만 그 중에는 조금만 주장과 증명을 보완하면 승소할 수 있는 경우도 있어 ‘힌트’를 주고 싶을 때도 있는데, 이는 반대편 당사자 입장에서는 불공정한 재판을 한다고 느낄 일일 뿐만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처분권주의와 변론주의 원칙을 허물어뜨리는 것이 되므로 법관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민사소송의 당사자는 본인의 책임과 노력으로 소송을 진행해야 함을 명심하고, 그것이 힘들다면 소송구조제도 등을 이용하여 법률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보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