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는 오랜 세월 농경 생활을 함께 해와 사람과 매우 친근한 동물이다. 인류가 야생의 소를 가축화한 것은 기원전 8천 년경 메소포타미아 평원의 초원지대에서 시작됐지만 소를 농사에 이용한 것은 6세기 들어서다. 경포해변의 백사장 모래알처럼 많은 시간 함께 길을 걸어온 소는 문화에 여러 흔적을 남기고 있다.
우리 선조들이 생활에서 얻은 가치와 교훈을 표현한 속담에 동식물이 많이 등장한다. 그중에 소와 관련된 속담은 200여 개나 된다. 소가 우리 생활과 얼마나 깊이 연관돼 있었는지 짐작이 간다. 소귀에 경 읽기. 소 읽고 외양간 고친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 난다 등 소와 관련된 속담엔 대부분 ‘금기’와 ‘부정’이 많은 편이다. 소가 귀중한 재산과 힘이 쎈 권력의 상징임을 보여 준다.
전 국민이 즐기는 민속놀이 중 윷놀이에도 소의 흔적이 남아 있다. 윷가락을 공중으로 던져 나오는 경우의 수 ‘도(돼지), 개(개), 걸(양), 윷(소), 모(말)’는 모두 집이나 목장에서 기르던 네발 달린 가축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목축에 유리하지 않은 돼지를 제일 아래에 두고, 목축을 도와주는 개를 그다음으로 하고, 젖과 고기를 제공하는 양, 소, 말을 상위 개념으로 잡은 것을 알 수 있다. 희망, 실속, 이익, 근면의 상징인 소를 농사의 한 축을 담당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홍천, 정선, 영월에 가면 소를 이용한 농사를 하는 이어가고 있지만 점점 사라져 지역 축제에 재현되는 이벤트로 등장하고 있다. 과거 3월이면 강원도 농민들은 소를 이용해 논과 밭을 갈아 한 해 농사를 시작했다. 멍에, 성에, 보습, 한마루, 술, 볏은 소를 이용해 땅을 갈 때 쓰는 기구를 부르는 명칭이다. 이것을 부르는 사람도 점점 드물어져 마침내 사라지는 날이 언젠가 올 것이다. 쟁기는 경운기가 농촌에 도입되기 전 가장 중요한 농기구였다. 농부는 농기구를 자신의 몸에 맞춰 직접 만들었고 필요에 따라 끊임없이 개량해 사용했다. 한 마리 소로 논밭을 가는 것은 '호리'라 했고, 두 마리 소를 이용하는 것은 '겨리'라 불렀다. 겨리 쟁기는 강원도를 비롯 이북 지역에서 주로 사용하던 방법으로 돌밭이 많은 억센 땅을 일구며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애환이 들어있다. 겨리쟁기 문화는 강원 농경문화의 상징이다. 겨리는 강원도를 포함해 평안도,함경도 등 지역에서 볼 수 있는데 그만큼 땅이 척박해 한 마리로는 밭을 제대로 갈지 못하기 때문이다. 쟁기의 성능 못지않게 그것을 다루는 능력과 기술도 중요해 집안 대대로 대물림으로 전해져 내려왔다. 쟁기질 솜씨로 새경이 정해지는 시절인 만큼 쟁기질을 잘하는 총각은 인기가 높아 혼인하는데도 더 유리했다. 지역마다 차이는 있지만 소 한 마리의 품삵은 두 사람 혹은 두 사람 반을 쳤다. 겨릿소로 하루 일을 했을 경우 5인의 일당을 받았으니 소를 다루는 일꾼은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겨릿소는 오른쪽에 맨 소를 마라소, 왼쪽에 맨 소를 안소라 부른다. 든든한 안소의 주도로 밭갈이를 하는데 “이랴, 이랴”, “어서 가자”, “즛즛즛 안소 돌아 돌아”, “그러취” 밭갈며 부르던 노동요도 방송국의 녹음자료로만 들을 수 있다.
1970년대 농촌으로 산업화 물결이 들어오자 소를 이용한 농사는 1990년까지 이어지다 더 이상 자리를 지킬 수 없었다. 농촌에서 소는 재산목록 1호인 경우가 대부분으로 대학을 가는 자녀 등록금, 장가 밑천을 마련하기 위해 요긴하게 사용됐다. 농사일을 함께 하던 일꾼과 재산형성의 중요한 위치를 유지했던 소가 입맛을 돋우는 음식으로 소비되는 시대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