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2년 10월 풍한증으로 인해 오른쪽 어깨에 통증을 느낀 중종은 의원 하종해와 홍침을 불러 자신의 맥을 짚은 의녀(대장금)의 말을 듣고 약을 올리라는 지시를 내린다.
대장금에 대한 중종의 신뢰를 볼 수 있는 대목이지만 내의원(內醫院)에 있는 남성 의원들에게 이러한 상황은 곱게 보일리 없었다. 성리학의 영향으로 남녀 구별이 엄격했던 것은 물론 남성 중심적 사고가 팽배했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아녀자의 진료를 위해 뽑아 놓은 의녀가 옥체를 돌본다는 것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임금의 하명에도 제조 장순손과 김안로는 중종을 찾아 그러한 결정을 재고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들은 중종에게 “의녀에게 진맥을 하게 하는 것은 마음에 편치 못합니다. 의녀의 의술이 의원(醫員)만 못하니, 의원으로 하여금 들어와서 살피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아뢴다. 대장금에 대한 시새움과 불신을 이미 알고 있던 중종은 이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의원들이 재차 맥을 짚도록 허락한다.(중종실록 73권, 중종 27년 10월 21일)
사실 의녀 대장금을 중종이 중용하는 것에 대한 신하들의 반응은 시대적 상황을 놓고 볼 때, 일면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다.
의녀가 될 수 있는 대상이 관에 속한 노비인데다, 사람들의 병을 고치거나 간병을 담당하는 일 이외에도 의기(醫妓)라고 불리며 연회에 불려나가 술을 따르는 등 기생역할도 했기 때문에 내의원 소속 의녀라 하더라도 신분을 천하게 여기고 얕잡아 보는 분위기가 생겨날 수 있었다.

하지만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출산을 돕고, 어머니 자순대비의 병환을 돌보는 등 오랜 시간 동안 쌓인 대장금에 대한 신뢰는 쉽게 깨지지 않았다. 임금의 신임에도 시기와 질투의 한가운데 서 있던 대장금의 의녀 생활은 시험의 연속이었다. 그것은 종기로 고통 받고 있는 중종의 병을 낫게 해야만 계속 이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1533년 1월 중종은 자신의 종기가 쉽게 낫지 않아 향후 2~3개월 안에 정무를 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순손, 박세거 등 신하들은 의녀(대장금)에게 진찰시켜 약을 쓰는 것이 어떻겠냐고 의견을 냈고, 중종은 이를 받아들인다.(중종실록 73권, 중종 28년 1월 4일·9일)
그로부터 한달여 뒤인 2월11일, 중종은 “내가 여러달 병을 앓다가 이제야 거의 회복이 되었다. 약방 제조와 의원들에게 상을 주지 않을 수 없다”며 좌의정 장순손, 예조 판서 김안로 등 신하들에게 상을 내린다. 대장금도 쌀과 콩 15석을 받는다.(중종실록 73권, 중종 28년 2월11일) 중종이 상을 내릴 인물로 지목한 첫번째와 두번째에 이름을 올린 장순손과 김안로는 아이러니하게도 불과 4개월 전 대장금이 임금의 맥을 짚는 것에 실력 운운하며 반기를 들었던 인물이었다. 결국 대장금 처방 덕에 상까지 받게 된 것이다. 대장금은 어의녀로서 마지막까지 중종의 곁을 지키며 그의 병세를 설명하고 알린 인물로 역사에 남게 된다. (중종실록 105권, 중종 39년 10월 25·29일, 11월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