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조선왕조실록·의궤 톺아보기]“조선시대 최고의 ‘셀럽’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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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열전 (2) 김만덕(下)
출륙금지령도 해제시킨 김만덕의 ‘선행’
“선행 널리 퍼져 누구나 만나고 싶어해”

◇‘정조를 알현하는 김만덕’ 김만덕 일대기 공모사업 선정된 강부언 화백 작품. 출처=김만덕 재단

자신이 평생 모은 재산을 털어, 굶주림에 죽어가던 제주 백성을 구한 김만덕의 선행(※중편 참조)은 당시 제주목사의 보고로 인해 정조에게 알려졌고, 이에 감복한 정조는 기꺼이 만덕의 소원을 들어주겠노라고 약속한다. 그가 가슴 속 깊숙히 품었던 소원은 바로 바다를 건너 한양을 구경하고 금강산 유람을 하는 것이었다.(정조실록 45권, 정조 20년 11월 25일) 언뜻 소박한 요청처럼 보였지만 제주도민에게는 섬을 떠나는 것 자체가 철저하게 금지돼 있었다. 이른바 ‘출륙금지령(出陸禁止令)’ 이 내려져 있었기 때문에 당시 법대로(?)라면 여행은 고사하고 뭍에 발을 내디디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특히 제주 여성의 경우 ‘월해금법(越海禁法)’이라는 법령에 의해 바다를 건널 수도, 육지에 시집을 가는 것도 금지돼 있었다고 하니 만덕의 소원은 금기를 깨뜨리는 것은 물론 국법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었다.

이러한 걸림돌이 있음에도 만덕은 정조의 배려로 쉰여덟 되던 해(1796년) 가을 한양 땅을 밟는다. 이에 앞서 1월에 봉상시 부봉사로 있던 제주출신 변경붕(1756~1823)을 통해 제주의 실상을 알게 된 정조가 제주도민을 구제하기 위해 출륙금지령을 해제하라는 지시(일성록 정조 20년 병진 1월 12일)를 내렸으나 제주목사 이우현이 장계를 올려 반대 의사를 밝힌 적이 있다. 정조는 이에 제주도민을 굶어 죽게 한 죄를 물어 이우현에게 행견(行遣)의 법(유배형)을 시행하도록 지시한다.(정조실록 44권, 정조 20년 1월 15일) 정조 뜻이 이처럼 추상같았고, 단호했으니 만덕이 땅을 밟는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마침내 이우현의 후임 제주목사로 부임한 유사모는 만덕이 육지로 나갈 수 있도록 허락했다는 장계를 정조에게 올린다. (일성록 정조 20년 병진 7월 28일)

◇‘금강산 유람하는 김만덕’ 김만덕 일대기 공모사업 선정된 강부언 화백 작품. 출처=김만덕 재단

하지만 만덕의 ‘상륙기’는 시작부터 녹록치 않았다. 막상 한양으로 올라왔으나 추위로 인해 곤욕을 치르게 된다. 이 내용을 듣게 된 채재공(1720~1799)은 정조에게 선처를 해달라고 아뢴다. 이에 정조는 “비변사로 하여금 다시 그녀에게 물어, 바라는 대로 서울에 머물렀다가 봄이 온 후에 금강산으로 내려 보내 구경할 수 있게 한 다음 양곡과 돈을 지급하여 뱃길로 본향(제주도)에 떠나보내게 하라”고 당부한다.(승정원일기 정조 20년 11월 24일) 정조는 이에 그치지 않고 한양에 머물던 만덕을 내의원의 의녀로 삼은데 이어 의녀 반수(班首·우두머리)의 벼슬까지 내린다. 심지어 초계문신의 시험에 ‘만덕’을 제시어로 내놓을 정도였다. 정조를 알현해 문안인사를 올린 만덕은 이듬해(1797년) 3월 금강산으로 향한다. 만폭동과 중향성의 기이한 경치를 보고 고성 삼일포 거쳐 통천 총석정에 올라 아름다운 풍경을 구경 한 후 한양으로 돌아와 입궁해 하직인사를 올린다. 만덕의 선행은 이미 한양에 파다하게 퍼져 너나 할 것 없이 그의 모습을 보려고 했다.(번암집 55권 ‘만덕전’) 요새 표현대로 셀럽이 된 만덕은 제주로 금의환향한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하고 일생 최고의 시간을 보낸 만덕은 1812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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