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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석기가 만난 사람] ‘仁醫 44년’ 소아외과 대모…병원 떠나면 춘천에 무료 상담소 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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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살이 10년, 박귀원 중앙대병원 소아외과 임상 석좌교수

소아 수술의 세계적인 명의(名醫).

그런데 환자를 돌보는 어진 성품이 실력보다 더 돋보여, 인의(仁醫)라는 말로 더 자주 불리는 이.

박귀원(74·사진) 중앙대병원 소아외과 임상 석좌교수가 춘천살이를 시작한지 어언 10년의 세월 흘렀다. 대한민국 소아외과 대모로 불리고 있는 그는 왜 춘천에 왔을까. 지난 40여년 동안 모두 3만건 이상의 수술 경력이 있는, 그야말로 이 분야 최고의 권위자인 그다.

춘천에 스며든 그 해(2014년) 2월 근무하던 서울대 병원에서 정년을 모두 채우고 퇴임까지 했으니 이제 홀가분한 기분으로, 그래도 조금은 편히 쉬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지금도 필드를 뛰는 현역 신분인 건 여전하단다.

대학 선배인 김성덕(전 중앙대병원 의료원장) 남양주 현대병원 의료원장의 부탁이 그를 다시 진료실로, 또 수술실로 불러 들였다.

우연한 기회에 박교수를 알게 됐고, 내친김에 약속을 잡아 그가 살고 있는 곳, 춘천 감주사를 찾았다. 지난달의 일이다.

시종 환한 웃음, 인자한 표정과 함께 한 그와의 인터뷰는 지난 달 감주사 공양간에서 한시간 가량 이어졌다.

먼저 그의 하루는 어떨까 궁금했다. 그가 살고 있는 곳이 고급진 아파트도, 멋들어진 전원주택도 아닌 자그마한 절이었기 때문이었다.

“스님들과 똑같이 하루를 시작하지는 못해요. 매일 남춘천 역에서 출발하는 새벽 열차를 타야 해서 저는 일찍 절을 나서야 하거든요. 스님께는 미리 양해를 구했죠. (저는) 열외하는 걸로…(웃음). 병원 원장님께도 말씀드려 복잡한 시간대를 피해 퇴근도 조금 일찍하고 있어요. 병원에서는 지금도 월·화·수는 외래를 보고, 목·금은 수술을 집도하는 생활을 있습니다. ”

그는 새벽 일찍 일어나 어김없이 남춘천역으로 향한다. 남춘천역에서 새벽 6시12분에 출발하는 ITX-청춘 첫 기차를 타고 용산역에 도착하면 오전 7시 33분. 다시 지하철 1호선과 9호선을 번갈아 타고 흑석역에서 내려 병원에 막 닿으면 정확하게 8시가 된다.

이렇게 하루 꼬박 4시간이 소요되는 출퇴근 시간이 불편할 법도 하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오히려 이게 편하다고 했다.

“서울에서 살 때는 강북에 집이 있었는데, 강북에서 중앙대 병원까지 차를 운전하고 오면 이삼십분 걸려도 차가 엄청 막히고 그래서, (불편했어요) 그걸 생각하면 (오히려) 운전 안하고 기차를 타고 다니는게 훨씬 편하고 더 좋죠. 많이 걷게 되니까 건강에도 도움이 되고, 명상하는 시간까지 버는 셈이니까요.”

◇서울대 병원 근무시절, 수술복을 입은 박귀원 교수

박교수의 부친은 대장항문 분야의 개척자인 박길수 교수이고 어머니도 산부인과 의사였다. 큰 언니와 셋째 언니는 의대, 둘째 언니는 치대를 나왔으니 말그대로 의료계 집안이다. 정작 넷째 딸인 자신은 의대 생각이 전혀 없었다. 법대를 가고 싶었다고. 하지만 아버지는 박교수의 이런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학비를 대줄 수 없다고 하시니 어쩔 수 없이 의대에 들어가게 된거죠. 아버지도 법대를 가려고 하시다가 의대에 들어가셨다고 해요. (당신이) 시간이 지나 생각해 보니 판사나 검사는 옳고 그름을 결정해 사람을 단죄해야 하는 자리인데, 그것보다는 사람들을 돕고 병을 고쳐 그들을 살리는 의사라는 직업을 택하는 것이 훨씬 낫지 않겠냐고 하시면서 저를 설득 하신거죠.”

그는 대학을 졸업하면서, 당시 여의사로서는 관행에서 벗어나는 결정을 내린다. 자신의 진로를 외과로 정한 것이다. 이번에도 아버지의 반대가 있었다. 게다가 어머니도 극구 만류 했고, 자신이 일할 서울대 병원조차 반기지 않았다. 당시 세태를 봤을 때, 그들에게도 그럴만한 이유들이 있었겠지만 박교수의 결정 그리고 운명 모두가 향하는 곳은 외과였다.

“아버지께서 “누가 여자한테 배를 내놓고 수술 해달라고 하겠냐”고 하시면서 말리시는 거예요. 심지어 산부인과를 추천하신 어머니는 (외과를 포기 시키려고)저를 데리고 멀리까지 사주하고 관상 보는 분들에게 간거죠. 그런데 제가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으니 본인이 하겠다는 거 그냥 내버려 두라는 말씀들을 하시더라구요. (웃음) 어머니는 화가 잔뜩 나서 그 길로 집에 돌아가시고 저는 바로 병원에 서류를 내게 된거죠.”

병원에서는 외과를 포기하라고 그를 말리면서 당직 얘기를 꺼내들었다고 한다. 서울대병원에서는 수가 적었던 여의사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당직을 빼주는 것이 당시 불문율처럼 지켜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병원이 꺼내든 마지막 카드같은 것이다. 박교수의 대답은 “하겠다”였다. 게다가 외과 지원자 중에서 성적이 가장 좋았으니 그를 딱히 거부할 방법도 없었다. 그렇게 서울대병원 첫 여자 외과의사는 탄생하게 된다. 그런 그의 결정은 틀리지 않았다. 오히려 환자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진료를 하고 있는 박귀원 교수. 사진=연합뉴스

“스물다섯, 1974년 9월 춘천도립병원(현 강원대병원)에 파견 근무를 나왔을 때, 많은 환자를 진료했는데 한 농부에게 질문을 한 적이 있었어요. 젊은 여의사가 수술을 해준다고 하니까 겁 안났냐고. 그러니까 그 분이 “에이~ 바느질은 여자가 더 잘하잖아요” 그러면서 수술을 너무 잘 받았다는 거예요. 아무튼 간호사, 환자, 환자 가족들과 동고동락하는 레지던트 4년 기간 동안 “여자 의사니까 바꿔주세요”라는 소리를 단 한번도 들은 적이 없었어요.”

힘든 수련의 과정을 거친 박교수는 1977년 마침내 외과 전문의가 된다. 그리고 1년 뒤 서울대학병원 소아외과가 생겨나고, 원자력병원에서 일하고 있던 그는 또 한번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미국에서 돌아 온, 은사 김우기 박사(당시 서울대 의대 조교수)가 함께 일해보자고 권유를 한 것. 처음 의대를 갈 때 들은 아버지의 조언처럼 은사의 한마디가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당시 은사님께서 “어른은 (수술을 통해) 5년을 더 살게하면 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 아이들은 80년을 더 살게 할 수 있으니 그 만큼 보람이 있다”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사실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그렇게 몇 주간 고민을 하다, “알겠습니다. 하겠습니다” 했죠. 그래서 79년 9월부터 소아외과 전임의로 생활을 시작하게 된거죠. 딱 1년만 생각한게 벌써 44년이나 흘러 버렸네요.(웃음)”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박교수는 2006년 한국여자의사회 회장을 맡으면서 불교와 인연을 맺게된다. 의사회에 ‘문화유산사랑회’라는 답사동아리가 있었고, 자연스레 전국의 사찰을 다닌 것이 그 시작이라고 한다. 그것은 불교 교리 공부가 이어졌고, 불자약사보리회를 전신으로 하는 봉사단체 ‘무량감로회’ 회장으로, 회원으로 오늘날까지 꾸준하게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가 지금 절을 집 삼아 살고 있는 이유다.

“병원을 다니면서도 시간을 내 능인선원에서 교리공부를 졸업할 무렵 (경기도) 남양주 절(명현사)에 계시던 시목스님을 알게 됐어요. 지인 소개로 우연히 인사를 드렸다가 퇴임 무렵에는 거의 매일 스님을 만나러 간 것 같아요. 스님께 퇴임하게 되면 모시고 살고 싶다고 말했더니 스님께서 딴 사람은 몰라도 저는 받아주시겠다고 하셨죠. 그리고 스님이 춘천으로 오시면서 저도 함께 오게 된거구요. ”

박교수는 중앙대 병원에서 의사로서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모두 마무리 하게 되면, 춘천에서 의사가 아닌 또다른 삶을 살고 싶다고 밝혔다.

“저도 건강이 언제까지 허락할지 모르니…, 이제 환자를 보는 일은 그만두고, 춘천에서 무료로 의료 상담소를 운영하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어요. 많은 분들과 좋은 인연을 맺으며 과분한 삶을 살았으니, 이제는 이웃들과 나누는 삶을 살고 싶어요. 이렇게 따뜻한 차 한잔, 말 한마디 나누면서 말이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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