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정치에서는 10여년만 존속하면 ‘장수(長壽) 정당’의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 수 있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500여개나 명멸한 정당의 평균 수명이 3년 정도다. 이같이 잦은 당명 변경만큼 한국 정치의 부박(浮薄)함을 잘 보여주는 사례도 없다. 인물과 정책은 변한 게 없는데, 선거를 앞두고 헤쳐 모여 한 후 간판만 바꾸는 이벤트로 전락한 게 한국 정치의 창당이고, 당명 개정이다. ▼미국은 1828년 민주당, 1854년 공화당이 창당된 이후 줄곧 같은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공화당은 ‘워터게이트 사건’에도 당명을 바꾸지 않았다. 남북전쟁에 패했던 민주당도 지금까지 같은 이름을 지켰다. 의회 정치의 시조인 영국 또한 보수당은 1912년, 노동당은 1906년 창당 이후 당명은 그대로다. 가까운 일본 역시 자유민주당도 창당 후 지금까지 같은 당명을 쓰고 있다. ▼우리나라의 잦은 당명 변경은 정당이 이념과 노선, 정책을 근간으로 하지 않고 인물·보스 중심으로 이합집산한 구조 탓이기도 하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될 수 없다. 즉, 정강 정책과 인물은 그대로 둔 채 간판만 바꾼다고 새로운 정당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는 지난 5일 신당 창당과 관련해 “비명(비이재명)계를 포함해 진보정당 계열 인사들과 교류하고 있다”며 이미 실무적 준비까지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인요한 국민의힘 혁신위원장이 직접 이 전 대표를 찾으며 ‘통합’을 강조했지만 신당을 향한 버스는 이미 시동을 건 모양새다. 이 전 대표는 전날 인 위원장 앞에 “(당을) 혁신으로 고쳐 쓸 단계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환자는 서울에 있다”며 윤석열 대통령과 각을 세웠다. 공자는 “올바른 정치는 정명(正名)에서 출발한다”고 했다. 하지만 정명은 허울뿐이다. 선거 때만 되면 어지러울 정도로 신당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 전 대표의 신당 추진이 정치권 태풍의 눈이 될지, 찻잔 속의 태풍이 될지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