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 해안선을 따라
조성되는 트레킹 코스는
길이 제대로 나기 전에는
거의 대부분 군사지역으로
분류돼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됐던 곳들이다.
속초 ‘외옹치 바다향기로
(이하 바다향기로)’가
바로 그런 장소 중 하나다.
기상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아
원하는 날 걷는 것이 가끔은
쉽지 않을 때도 있어
아쉬움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오랫동안
사람들의 손을 타지 않아
청정 자연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다는 점은
이 길의 큰 장점으로 꼽을 수 있다.
궂은 날씨 때문에
걷기에 나설 수 없는 불편함쯤은
감수하고도 남을 만큼의
매력은 충분히 지닌 길이다.
■‘바다향기로’도 식후경
바다향기로는 외옹치항에서 속초해수욕장이나 속초해수욕장에서 외옹치항 방향으로 걷는 해안 산책로다. 서로를 들머리, 날머리로 하고 있어 어디에서 출발하든 동해 바다의 아름다운 풍광들을 쉬이 만나볼 수 있다. 이 길의 전체 길이는 나이에 상관없이 부담스럽지 않게 걸을 수 있는 1.74㎞ 정도다. 오늘 들머리는 외옹치항이다. 외옹치항 활어회센터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바다향기로를 걷기로 결정했다.
멀리 동해 바다의 수평선과 눈맞춤하며 부지런히 달려 언덕배기 정상. 외옹치해수욕장·외옹치항 갈림길에서 우회전한다. 오른편에 장승 커플이 스치는데 천하대장군 하얀 배 위에 글귀 포착. ‘바닷가 솟대마을 외옹치’. 길은 다시 내리막으로 변한다. 이내 큼지막하게 세워진 ‘외옹치 활어회센터’ 간판과 조우. 천천히 달리다보니 짠내가 코끝에 닿는다. 외옹치항이다. 한적한 느낌의 전형적인 어촌 모습이다. 활어 난전은 가격을 흥정하는 목소리에 웃음이 녹아들어 여기 저기에서 유쾌함이 흐른다. 고기잡이 배가 매일같이 드나든다고 하니 횟감의 싱싱함 정도는 최고다. 무엇보다 외지인보다는 현지인이 더 많이 찾는 곳이라고 하니 앞뒤 안 보고 일단 인정. 제대로 낙점(落點)을 하지도 않았는데 전복치(괴도라치)와 쥐치, 노래미, 오징어, 멍게가 바구니에 한가득 담긴다. 이내 푸짐한 모듬회 한 상이 차려지는데 밑반찬이 많거나 화려하지는 않아도 회 하나는 싱싱하고 푸짐하다. 그러니 맛은 두말할 것 없다. 그냥 만족이다.
■명상으로 시작하는 ‘바다향기로’
매운탕까지 깨끗이 비우고 나서야 자리를 뜰 수 있었다. 배도 채웠으니 길 위에 오를 시간. 외옹치 방파제 끝자락에서 유턴. 언덕 위로 솟은 롯데리조트 건물이 보이는 방향으로 향한다. 그 아래 바다향기로 들머리가 어렴풋이 보인다. 발걸음을 재촉해 본다. 순간 싱그러운 바다 내음이 바람에 실려 온몸을 스친다. 그 바람은 발걸음을 앞질러 언덕을 감싸는 해송(海松) 숲 사이로 들어선다. 그리고 소나무 사이를 이리저리 헤집고 다닌다. 그런데 거기서 이상하게도 파도소리 같은 것이 들려온다. 바다와 뭍에서 넘실대는 파도소리를 품고 길 떠날 채비를 한다.
그런데 다가갈수록 나무 생김새가 소나무가 아니다. 이리저리 가늘게 흔들리는 모습이 누가봐도 대나무다. 그럼 아까 들었던 것이 소나무가 아닌, 바람을 만난 대나무 잎의 떨림이 보내 온 소리라는 건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쏴아~, 대숲에서 쏟아져 내리는 파도소리가 선명하게 다가온다. 이내 바다향기로 입장. 왼쪽으로 온통 대나무 천지다. 파도소리를 내는 대숲과 진짜 요란한 파도소리를 내는 바다 사이에 끼인 채 그 한가운데 길에 서 있으니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다. 바닷가에서 자란 대나무면 ‘해죽(海竹)’이라고 불러야 할까. 해죽은 대나무로 만든 가늘고 연한 채를 일컫는 ‘양금채’를 뜻하기도 한다는데 또 그 단어 안에는 ‘가냘프고 고운 목소리’라는 해설도 있단다. 나는 대숲에서 번지는 이 소리를 ‘파도소리 닮은 고운 목소리’라고 부르고 싶다. 바다향기로 외옹치항 방면 들머리에 있는 ‘대나무 명상길’은 그래서 더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건 아닐지.
대나무 명상길 바닥에는 폭신폭신한 야자수 매트가 깔려 있다. 그래서 더 편안함을 주는 것 같다. 오른쪽, 바다 방향 길옆으로 이름 모를 풀이며 나무들이 키 높이만큼 자라 있어 길을 중심으로만 본다면 산골 어느 한적한 숲길을 오르는 느낌이 들 수도 있겠다. 적어도 냄새만 없다면 말이다. 하지만 바다 내음만큼은 숨길 수 없다. 그냥 짠내 정도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냄새다.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눈을 감게 하고, 또 생각에 잠기게 하는, 감성 한 스푼 더 얹은 그런 향(香)이 느껴진다.
길은 어느새 나무 데크길로 변한다. 시야가 환하게 트인다. 이제 바다도 눈에 들어온다. 여기부터 ‘하늘데크길’이다. 데크 아래로 갯바위들이 무질서의 질서 속에 멋스럽게 늘어서 있다. 그 갯바위를 감싼 바다 빛도 청아하고 아름답기 이를 데 없다. 언덕에 머물던 산색(山色)이 흘러내려 바다에 닿았는지 바다색은 온통 옥빛의 향연이다. 그 옅은 초록의 기운은 나무 데크로를 타고 발걸음을 따라 쉼없이 흐른다.
■소거(消去)의 미학
걷다 보니 왜 이 길을 하늘데크길이라고 이름 지었는지 알 수 있겠다. 길 앞에 계단이 나타나는가 싶더니 그대로 하늘로 향한다. 하늘을 향해 오르던 계단은 때마침 나타난 길모퉁이에 가려 사라져버리고 그 앞으로 구름을 휘핑크림처럼 두른 새파란 하늘이 등장한다. 얼마 걷지 않은 것 같은데 넓게 만들어진 전망대 공간이 나타난다. 잠시 쉴까 하다 휴식 계획은 따로 있으니 패스. 이내 하늘데크길에서 가장 유명한 ‘남자친구’ 촬영지에 도착. 드라마 속에서 송혜교와 박보검의 만남이 있었던 그 장소다. 여기저기 사진 찍기에 여념 없다. 충분히 쉼을 갖고 다시 출발. 하늘 위로 가파르게 계단이 이어진다. 이번엔 철책과 또 다른 계단이 나타난다.
갈림길이다. 왼쪽 계단을 택하면 롯데리조트, 오른쪽 철책을 따라가면 외옹치해수욕장 방향으로 갈 수 있다. 두말할 것 없이 우향우. 여기부터 ‘안보체험길’이다. 이곳에 둘러쳐진 해안선 경계 철책은 19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후 설치했던 것을 대부분 철거하고 일부 남겨 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제는 동해 바다를 배경으로 갤러리로 변신한 모습이다. 철책에는 6·25전쟁, 흥남철수, 아바이마을 이야기들을 새겨놓은 조형물이 걸려 있고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와 남과 북이 서로 악수하는 손 등 전쟁으로 인해 겪어야 했던 우리의 아픈 과거와 현재는 물론 모두가 소망하는 미래에 대한 기대까지 담아놓고 있다.
발길은 이제 네 번째 길 ‘암석관찰길’로 이어진다. 기기묘묘(奇奇妙妙)한 돌들이 즐비하다.크기는 다양한데 공통점이 하나 있다. 얼마나 오랜 시간 파도에 깎이고 쓸리기를 반복했는지 어디 귀퉁이 한군데 모난 곳 없이 모두 둥글둥글하다. 이내 푹신한 외옹치해수욕장 백사장에 풍덩, 발을 담근다. 이대로 바다향기로가 끝이냐구? 아니다. 우리는 새들의 천국이라고 불리는, 속초 8경 ‘조도’를 바라보며 길을 매조지하러 1㎞ 남짓, 속초해수욕장을 향해 또 다른 여정을 시작한다. 이 구간은 백사장 명상길, 조도 관찰길 정도로 이름 지으면 어떨까.
마음속 뮤트(MUTE) 버튼 작동. 북적이던 사람들의 소리는 스르륵 자취를 감춘다. 파도소리, 바람소리 그리고 길 위의 이야기만이 머문다. 그곳을 걷고 있는 나만이 오롯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