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조선왕조실록·의궤 톺아보기]왕실 종친 아내 어우동은 왜 성적 자유를 갈구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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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열전 ① 어우동(上)

◇성종실록 119권, 성종 11년 7월 9일

‘어우동(於宇同·또는 어을우동)’은 조선시대에 벌어진 여러 추문들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사건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정절’을 여인이 지켜야 할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던 시절에 다양한 신분의 뭇남성들과 간통을 벌인, 당시 사회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문제적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야기 자체가 워낙 파격적이다 보니 조선왕조실록에도 어우동이라는 이름은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 영화 등의 영향으로 어우동을 기생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상당한 위치에 있는 양반 가문의 자손으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는 승문원지사로 있던 박윤창이고, 남편은 태종의 서증손자인 태강수(泰江守) 이동(李仝)이다. 이른바 종친(宗親·왕의 부계친척)의 아내였던 것이다. 어우동의 사건이 실록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성종 11년(1480년) 6월이다. “방산수(方山守) 난(瀾)이 태강수(泰江守) 동(仝)의 버린 아내 박씨(朴氏)를 간통하였으니, 국문하여 아뢰라.(성종실록 118권, 성종 11년 6월 13일)” 방산수(方山守) 이난(李瀾)이 세종의 서손자이기 때문에 7촌 조카의 부인과 간통을 한 것이니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왕실에서 상상도 하지 못할 일 벌어진 셈이다. 이 사건은 성종 입장에서는 상당히 곤혹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영화 ‘어우동: 주인없는 꽃’의 한장면.

시간이 지날 수록 간통 사건은 ‘수산수(守山守) 이기(李驥)’라는 또다른 왕족이 추가되면서 확대되는 양상을 보인다. 의금부는 “방산수 이난과 수산수 이기가 어을우동(於乙宇同)이 태강수의 아내였을 때에 간통한 죄는, 율이 장(杖) 100대, 도(徒) 3년에 고신(告身)을 모조리 추탈하는 데에 해당합니다.(성종실록 119권, 성종 11년 7월9일·사진)”라고 보고한다. 이에 대해 장을 때리는 것은 돈으로 대신하게 하고 귀양을 보내게 한다. 이틀 후 어우동과 간통한 인원은 기하급수적으로 늘게된다. 의금부는 또다시 “박강창·홍찬 등이 어을우동을 간통하고도 굳이 숨기고서 자복하지 않고, 어을우동이 어유소·노공필·김세적·김칭·정숙지·김휘·지거비를 간통하고도 은휘(隱諱·감추고 숨김)하고서 승복하지 않으니, 청컨대 형벌을 가하고, 어유소 등을 아울러 국문하소서.(성종실록 119권, 성종 11년 7월)” 라고 처벌을 청한다. 무려 9명이 더 추가된 것이다. 실록에서는 사건 초기 왕실의 일원인 방산수 이난의 일탈에 초점을 맞췄지만, 이내 도망친 어우동을 잡아들이라고 명령하면서 어우동이 전면에 등장한다. “박씨가 처음에 은장이와 간통하여 남편의 버림을 받았고, 또 방산수와 간통하여 추한 소문이 일국에 들리었으며, 또 그 어미는 노복과 간통하여 남편에게 버림을 받았었습니다. 한 집안의 음풍(淫風)이 이와 같으니, 마땅히 끝까지 추포하여 법에 처치하여야 합니다.(성종실록 118권, 성종 11년 6월 15일)” 어우동 어머니의 일을 예로 들어 ‘나쁜 피’ 프레임을 덧씌우고, 요부로서의 모습이 부각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사건의 이면에는 기생을 마음에 둔 남편 태강수 이동이 꾸민 계략이 도사리고 있었다. (계속)

영화 ‘어우동: 주인없는 꽃’의 한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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