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타임머신 여행 라떼는 말이야]춘천 제1봉직공장의 기억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춘천 제1봉직공장 여공들이 마루에 앉아 옷을 완성하기 위한 손바느질 작업에 여념이 없다. 1968년 5월. 강원일보 DB

우리나라는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공업화가 빠르게 진행된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이 이듬해부터 본격 시행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산업구조 바꾸기에 나선 것이 가장 큰 이유다. 1953년 국민소득 가운데 농·어업 비중이 47%로 제조업(9%)을 크게 압도하고 있는 사실상의 농업사회 상태에서 1960년 농어업 37%·제조업 14%, 1970년 농어업 27%·제조업 21%로 변화한데에는 정부가 주도한 군사작전 같은 빠른 정책수립과 의사결정, 실행이 주효했다. 이른바 ‘개발독재’라고 불리는 국가주의적 산업화 정책이 효과를 보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특별한 기술없이도 설비만 갖추면 진입할 수 있는 경공업, 그 중에서도 섬유공업, 면방직공업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여기에는 정부방침으로 수출목표액을 정하고 강제하는 이른바 ‘수출제일주의’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도 한 몫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강원도내에도 관련 공장이 들어서게 되는데, 1967년 춘천시 퇴계동 춘천경공업단지에 둥지를 튼 ‘제1봉직공장(제1봉직공업주식회사)’이 대표적이다. ‘봉직(縫織)’은 섬유나 천 등을 꿰메고 짜는 일을 일컫는 것으로, 현대의 의류공장이라고 생각하면된다. 실제 제1봉직공장에서는 스웨터나 와이셔츠 등지 제작됐다. 지금은 도로개설로 헐려나가 그 흔적을 찾아볼 수도 없게 됐지만, 준공 당시만 해도 박정희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차례로 방문할 정도로 큰 관심을 기울이던 산업현장이었다. ‘제1봉직공장’에는 아주 특별한 사연이 있다. 바로 1967년 수도권 전기공급과 용수조절을 목적으로 건립된 의암댐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게 된 수몰지구 주민들의 생활대책 마련 등을 이유로 제1봉직공장을 조성하게 됐다는 것이다.

◇춘천시 퇴계동 춘천경공업단지에 건립된 춘천 제1봉직공장의 전경. 강원일보 DB

설립 목적만 보면 공익적 성격이 짙어 보이지만 실은 수몰민들이 의암댐에서 받은 보상금을 자본금으로 하고 있는 이상한 형태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정부 융자를 보태 1만6,500㎡(5,000평) 부지에 공장을 세워 연간 300만 달러, 종업원 3,000명이 일하는 대형 산업체로 만든다는 것이 목표였다. 강원일보가 발행한 강원연감(1967년·236쪽)과 ‘영세자금 모아 이룩된 거대한 산업자금’ 제하의 강원일보 보도(1967년 9월21일자 1면 보도)에 따르면 제1봉직공장은 1966년 6월28일 기공식과 함께 공사가 진행 15개월 만인 1967년 9월20일 준공식을 갖게 된다. 자금난 때문에 재일교포 최서면씨에게 투자를 받게되고, 그를 사장으로 추대하지만 외환관리법 위반과 장덕수 살해사건의 공범인 사실이 밝혀지면서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강원도와 봉직기 제조회사가 대금을 납부하기로 약속하고 준공에 이르게 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박충훈 상공부장관, 박경원 강원도지사를 대동하고 참석한 준공식에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1971)에 있어서는 영세민의 소득향상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대통령은 “이 공장은 공장건설에 필요한 자본금을 국가에서 일반국영기업체처럼 직접 투자했거나, 또 한 두사람의 자본으로서 이루어진 공장이 아니라, 이 부근에 살고 있는 우리 농촌의 농민들과 춘천주변에 살고 있는 영세시민들의 영세자금을 모아 투자를 해서 이루어진 공장”이라며 “앞으로 이 공장이 훌륭하게 운영이 되어 여러분 가정의 소득이 늘고, 또 농촌과 도시에 있는 영세민 여러분들의 생활이 보다 더 향상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춘천 제1봉직공장 준공식 관련 강원일보 신문보도(1967년 9월21일자)

아이러니하게도 이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새롭게 추진하면서 투입하게 될 총 재원이 9,800억원이라고 밝혔다. 제1봉직공장 준공 당시 투입된 자금이 1억5,352만원인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국가 재정이 투입 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전국적인 모범 케이스로 치켜 세우면서 국가 정책에 수몰민들의 보상금이 활용됐다는 사실은 못살고 부족했던 그 때, 그 시절을 생각하면 어이없기도, 야속하기도 하다. 1966년 11월23일 대통령 비서실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제1봉직공장에 대한 보고서를 올린다. 국가기록원에서 찾은 이 보고서에는 “정부는 아무런 지원한 바 없음”, “융자 요청한 3,000만원을 지원하되 연말까지 1,000만원이라도 대여해 주는 것이 좋겠음”이라는 문구가 쓰여져 있다. 적어도 제1봉직공장 설립에 있어서 정부의 도움은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그럼 우리는 허울좋은 정부 정책에 기여하기 위해서 돈을 대고 노동력을 대면서 ‘자력갱생’에 내몰린건 아닐까. 문득 떠오르는 의문이다. 우리들의 할머니, 엄마 또 누나들이 겪어야 했던 저임금, 장시간 노동은 또다른 문제였다. 산업평화를 강조하고,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가능하게 한, 민초들에게는 한없이 불리한 노동법 개정도 함께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때 우린 정말 행복했을까.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피플&피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