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112년 동안 객지를 떠돌던 지광국사탑(국보 제101호)이 지난해 8월 고향인 원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 탑을 원래의 위치인 법천사지에 세울 것이냐, 법천사지유적전시관에 복원할 것이냐를 두고 문화재전문위원들의 의견이 분분했었다고 한다. 결국은 법천사지유적전시관인 실내에 복원하기로 최종 결론이 났다. 고려시대 최고의 걸작 석조 조각품이 후세에 오래도록 존치할 수 있는 길은 실내 복원이 최상의 선택일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이다. 모진 비바람과 세찬 태풍에도 거뜬히 견뎌 내야 하는 지광국사탑의 운명 말이다.
일제강점기에 무단 반출되었던 이 탑은 서울로 옮겨졌다가 바다 건너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고 다시 서울의 경복궁 경내로 돌아오는 등의 고초를 겪었다. 거기에 더해 6·25전쟁은 이 탑의 상흔을 더 깊게 만들고 만다. 미인박복이라 했던가. 너무도 뛰어난 석조 조각품이다 보니 이래저래 사람의 손을 타는 신세가 됐었다. 일제강점기 일본 사람들이 저지른 일이다. 갖은 부침을 겪던 지광국사탑은 2016년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된 보존처리사업에 나서게 되는데 연구진은 탑의 보존 처리를 위해 가장 적합한 석재를 찾는 작업을 시작한다. 원주를 비롯해 경기 포천과 이천, 경북 영주 등지의 채석장이 대상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지광국사탑과 석질이 유사한 돌을 찾아내는데 입자 크기와 강도 등을 분석한 결과 원주시 귀래면에서 채석한 화강암이 가장 유사한 재질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천년 세월의 극적인 만남이라 하겠다.
전북 고창의 선운사에 가면 내원궁 바위에 커다란 마애불상이 있다. 그런데 불상의 머리 위를 올려다보면 서까래를 끼울 수 있는 네 개의 네모난 구멍을 볼 수 있다. 비에 젖지 않도록 배려한 반 지붕의 이른바 닫집이다. 불전이나 궁전 어좌 위의 반 지붕 형태의 당가가 그것이다. 그런데 인조시대에 몰아친 태풍으로 무너졌는데 아직도 구멍은 비어 있다. 서까래를 끼워 복원하자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복원했을 때 더 훼손될 수 있다며 반대하는 학자들의 논리가 강했다는 후문이다. 지광국사탑의 실내 복원 결정 역시 훼손을 막기 위한 같은 논리였으리라.
남한강과 섬강이 만나는 합수머리로 아침 안개가 뽀얗게 피어오른다. 법천사지유적전시관에 들어섰다. 보존 처리를 끝낸 부재들이 전시관 1층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반가웠다. 지난해 가을에도 만났었지만 역시 감동이다. 오늘 이곳을 다시 찾은 것은 5월 초순부터는 기단부부터 탑을 쌓아 올리는 복원을 시작하기 때문에 분리된 부재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에 다시 걸음을 한 것이다. 다만 지난해 가을에는 대형 테마투어버스를 타고 편하게 올 수 있었는데 올해부터는 테마투어버스의 운행을 중단시켰다는 것이다. 왜일까? 물론 나름대로 합당한 이유는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의문이 드는 것은 그동안 12년을 달리던 테마투어버스가 지광국사탑이 복원되는 역사적인 첫해에 운행을 중단한다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우리가 지광국사탑에 관심을 갖는 것은 지광국사의 역사적 인물 때문이리라. 그는 고려 984년에 원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해린이요, 법명이 지광국사였다. 지광국사탑이 돌아왔고 원주 출신의 해린이 고향 땅을 밟은 셈이다. 지광국사탑의 역사적인 사실을 알고 법천사지를 돌아보면 어떨까? 시민단체와 불교계가 나서서 환수 운동을 펼친 결과 이뤄낸 쾌거다. 조선왕조실록과 의궤 또한 오대산 월정사 사고로 돌아왔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어록을 펼치지 않더라도 문화유산은 제자리에 있을 때 빛이 나는 법이다.
성황림 숲속 길로, 소금산그랜드밸리 길로, 구룡사 금강소나무 길로, 오대산 조선왕조실록 사고 길로, 단종 유배의 길로 그리고 법천사지와 거돈사지 길로 이 따사로운 계절에 떠나고 싶다. 문화관광해설사도 버스에 오를 것이다. 원주 테마투어버스는 달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