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이사할 때 책장이 모자라 붙박이장에 ‘일단’ 넣어뒀던 책들을 얼마 전 정리했다. 4년 동안 안 읽었는데 언제 또 읽겠나, 싶었지만 가진 게 책 밖에 없는 터라 하나하나 고르고 추려, 그래도 갖고 있을(언젠가 읽을 수도...) 책과 내놓을 책을 구분했다. 헌 책을 수거해 팔아주는 서비스를 소개 받았다. 트럭으로 책을 실어간 다음 날, 중고책 시장에 팔 수 있는 책값이라며 16만 원을 송금해왔다. 판매가치가 없는 책들은 그 자리에서 분쇄 해 버렸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 마디. “희귀한 책이랑 좋은 책 많던데... 보관 상태가 좋지 않아서 아깝지만 처리했습니다.” 그에게 건네준 책은 530권(기록 강박이 있는 나는 책들을 나란히 세워 사진을 찍고 수를 세어뒀다). 어떤 책을 남기고 어떤 책을 버렸을까. 어림잡아 100권은 살아남았을까?
오늘 아침, 헐렁해진 책장 정리를 하다가 갑자기 숨이 탁 막혔다. 내 인생의 한 부분이 사라져버린 것을 실감한 것이다. 1990년대부터 30년 넘게 살아남았던 책들인데. 그들 중 대부분이 소멸되었을 것을 생각하니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집 안은 시원해졌지만, 내 마음은 너무나 답답했다. 괜히 버렸나. 후회가 밀려왔다.
내가 처음 내 책을 갖기 시작한 것이 너댓 살 무렵인 것 같다. 두 살 아래 동생이 병약해서 엄마가 동생을 업고 나를 걸려 서울 중구 회현동의 정소아과에 다니셨다. 수많은 유당불내증 아이들을 살려낸 콩 음료가 동생에게도 효험이 있어, 엄마는 어려운 살림을 쪼개 열심히 병원을 드나들었다. 걸리적거리는 나는 병원 앞 헌책방에 앉혀두었다. 두어 시간이 지나도록 엄마를 찾지 않는 아이가 애틋했는지, 서점 사장님이 가끔 책을 주셨다. 엄마가 책을 사는 것으로 고마움을 표하면서 내 책은 점점 늘어났다. 고등학생 때까지 살던 서울 남산 기슭 조그만 집은 다락방이 서재였다. 아버지가 보시던 「사상계」 잡지, 「테스」, 「적과흑」, 「보봐리부인」 등 엄마가 읽던 소설을 섭렵한 것도 그곳이었다. 얻은 책, 빌린 책, 새로 산 책, 헌 책이 두서없이 뒤섞인 그곳은 나의 도서관이었고 우주였다. 사방 벽을 빙 둘러 책이 꽂힌 공간은 지금도 내가 꿈꾸는 천국이다.
몇 년에 한 번씩은 책을 정리했다. 직장이 바뀌거나, 직업이 바뀌거나, 드물게 이사를 할 때였다. 상대가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하다못해 흔해 빠진 공산품이든, ‘아름다운 이별’은 없다. 어떤 이별이든 쓸쓸함과 쓰라림, 아쉬움이 남는다. 둘 곳 없어 내보내는 책과의 이별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누군가 그 책들을 필요로 할 때다. 문예창작과에 진학한 조카가 문학 전집을 가져갈 때, 산속에 창작촌을 마련한 친구가 여행산문집과 인문학 책을 가져갈 때, 정말 기뻤다.
요즘 공공 도서관은 물론 대학 도서관도 오래된 책은 받지 않는다. 은퇴하는 대학교수들을 당혹케 하는 것이 평생 간직해 온 책이라고 한다. 이번에 내 삶에서 530권의 책을 치워 준 분은 교수, 기자, 작가들의 서재를 숱하게 치웠다고 한다. 중고로 팔 수 없는 책은 바로 파쇄 한다는 말에 머뭇거리는 내게 그가 말했다. “시효가 지난 지식입니다. 새로운 지식에 자리를 내줘야지요.” 오래된 책을 버리는 일은 결국 지난 시절의 나를 버리는 일인 것이다. 어떤 책을 남길지 선택 역시, 어떤 나를 지킬지를 생각하는 일일 것 같다. 쓸쓸함과 시원함이 엇갈리는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