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5월 즈음 우리 법원에 견학 올 예정인 고등학생들이 작성한 사전질문에 대한 답변을 작성하고 있었을 때였다. 질문들을 차례로 보며 답변을 작성하던 중 ‘판결에 애매모호한 요소가 있나요? 그럴 때는 어떻게 판결하시나요?’라는 질문을 보고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 다소 난감했다. 판결에 있어 애매모호한 요소가 무엇인지 딱 잘라 말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고민 끝에 견학 온 학생들에게는 재판의 기본원칙을 알려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민사재판의 기본원칙인 ‘변론주의’를 바탕으로 위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정리했다.
변론주의란 당사자가 권리 발생 및 소멸 등에 관한 주요 사실을 주장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자료를 수집해 제출할 책임이 있으며, 당사자가 수집해 변론에서 제출한 자료만을 재판의 기초로 삼을 수 있다는 원칙을 말한다. 원고가 피고에게 빌린 돈을 지급하라고 청구하는 사건을 예로 들고자 한다. 담당 법관이 당사자들이 제출한 증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연한 기회에 피고가 돈을 모두 갚은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피고가 돈을 갚았다는 사실을 주장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이체내역, 영수증 등)를 제출하지 않았다면, 법관은 판결에 있어 피고가 돈을 갚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고, 결국 피고는 원고에게 빌린 돈을 갚으라는 판결을 선고할 수밖에 없다.
한편, 변론주의의 내용 중 하나로 ‘자백의 구속력’이 있다. 재판 과정에서 자백이 있으면 그것이 적법하게 취소되지 않는 한 법원은 자백에 구속된다는 것이다. 앞서 든 대여금 사건에 관해 피고가 돈을 갚지 않았음에도 돈을 갚았다고 주장했고, 원고가 이를 인정(자백)하였다고 가정해 본다. 담당 법관은 원고가 자백을 적법하게 취소하지 않는 한 피고가 돈을 갚지 않았다는 판단이 들더라도 자백의 구속력에 따라 피고의 변제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변론주의에서는 당사자들의 주장, 입증의 정도에 따라 위 예시와 같이 실제 법률관계와 맞지 않는 판결이 선고될 수 있다.
물론 변론주의를 지나치게 형식적으로 적용하면 구체적 타당성에 반하는 결과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민사소송법은 법관으로 하여금 소송관계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 사실상 또는 법률상 사항에 대해 질문하고 그 증명을 촉구하는 석명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다. 또 판례는 당사자 주장의 맥락에 비추어 묵시적 또는 간접적으로 주장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경우에도 명시적으로 주장을 한 경우와 마찬가지로 주장을 한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변론주의가 민사재판의 기본원칙인 이상, 민사사건의 적정한 판단에 있어 제일 중요한 점은 당사자들이 자신에게 유리한 주장이 무엇인지,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가 있는지 무엇인지 충실히 검토해 재판과정에서 필요한 주장을 개진하고 증거를 제출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잘못한 것이고, 나는 무고하니 법원에서 이를 알아주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별다른 조치 없이 민사재판에 임한다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마주할 수 있다.
필자는 앞서 언급한 질문에 대해 당사자들이 필요한 주장을 하지 아니하였을 경우 변론주의 원칙에 따라 필요한 주장을 하지 않은 당사자들에게 불리한 판결을 선고할 수밖에 없다고 답변했다. 앞으로는 위와 같은 답변을 하지 않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