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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언대]생과 사의 중간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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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제국 전 강원일보 감사

모든 것이 때가 있다. 모름지기 태어날 때, 양육 받을 때, 세상에 쓰임을 받을 때, 건강하고 넉넉한 노후, 그리고 세상 떠날 때 그 과정 과정이 고루 멋있어야 한다.

장수시대가 되고 보니 집집마다 인생후기가 더 큰 걱정이다. 대체로 독고인생이거나 요양원이나 요양병원 또는 재활시설에서 약 덕분에 연명하며 나날을 보내고 있다.

안락사법이 없는 나라이다 보니 지금으로서는 연명치료 거부 약정이 최선이다. 그것도 정신 멀쩡할 때 해둬야 한다. 축복된 임종은 ‘자다가 세상 떠나는 것이다.’ 좌우간 죽음은 준비된 자와 미처 준비되지 못한 자간이 천양지판이다. 예컨대 준비된 자란 내세 영생이나 환생을 믿는 종교인, 줄기세포 보존, 냉동인간, AI시대 뇌 보존을 실행하는 진화론자, 별의 분자가 되겠다는 허무주의자 등이다. 후자일 경우 ‘사서 고생을 하다 가는’ 꼴이 되기 싶다.

몇 해 전 아내가 혈관성치매에 걸렸다. 사정등급을 받은 후 주간보호센터에 다니다가 몸이 무거워져 시내 요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요양원도 나름인데 이곳은 가족형 소규모 운영시설이어서 가족들은 인연을 지극히 감사하고 있다. 직계 세 자녀와 친인척들은 1~2주간 한 번 정도의 요양원 방문을 하고 있다. 나는 거의 매일 원장님과 전화인사를 나눈다.

내 보기엔 요양원이란 생과 사 변경의 여인숙이다. 투숙기간은 예단할 수 없으나 객주의 인품에 따라 과객은 안식을 누린다.

인지능력을 상실한 아내는 롤모델로서의 도리, 자존심, 권리와 의무 등을 버리고 육신의 기초적 평강을 누리고 있다. 욕심도, 질투도 없다.

평화천사 아기 같다. 그런 사람을 노엽게 하면 인지능력자가 벌 받는다. 세 자녀와 나는 게스트룸에서 음식과 노래잔치를 갖는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배운 하모니카로 아내 귀에 익숙했던 가곡과 찬송가를 연주한다. 아내도 따라서 부른다. 엷은 미소가 뜬다. 막내는 엄마 입술에 빨간 연지를 발라준다. 이렇게 살아 있는 동안 영원한 이별의 아픔을 조금씩 조금씩 삭여간다. 이것이 중간지대의 모습이다.

장수시대엔 생과 사의 중간지대가 생긴다. 삶도 죽음도 준비된 자에겐 여유롭게 다가온다. 무의식의 세계는 참으로 계시적이다. 사랑하는 엄마만이 아기의 울음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사랑은 영원한 이별을 초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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