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신호등]미성숙한 방어기제 ‘부정(Den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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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받았던 제보다.

강원도의 한적한 도로. 편도 1차선을 주행하던 승용차가 오른쪽에 위치한 주유소로 진입하던 중 준대형 트럭이 승용차 조수석을 들이받았다. 트럭 운전자가 본인의 잘못을 인정해 쉽게 해결되는 듯 보였다. A사 보험에 가입한 승용차 운전자는 전화로 사고를 접수했으며 곧바로 교통사고 조사원이 출동했다. 조사원은 현장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연락하겠다며 운전자들을 돌려보냈다. 그런데 승용차 운전자는 다음날 본인 과실 비율이 100%라는 황당한 통보를 받았다. 상황은 이랬다. 이 조사원은 A사는 물론 트럭이 가입된 B보험사의 직원이기도 했다. 강원도의 경우 면적이 넓고 인력이 부족해 한 사람이 여러 보험사와 교통사고 조사원 에이전트 계약을 맺는다는 것이다. 승용차 운전자는 이유가 뭐든 조사원이 사고현장을 왜곡한 보고서를 올려 과실비율이 뒤집혔다고 억울해했다.

사실확인을 위해 취재를 해봤다. A사의 보상팀장은 에이전트가 다수 보험사와의 중복 계약한 사실은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조사원은 정확한 보고서를 작성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교통사고 과실은 조사원이 현장에서 촬영한 동영상 및 사진, 교통사고 개요와 상황 등이 담긴 보고서를 중심으로 결정된다. 하지만 조사원의 자의적 판단이 개입되지는 않는다”고 단정지었다. 현장에도 없던 보상팀장이 조사원이 작성한 보고서가 왜곡될리 없다고 확신하길래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승용차 운전자랑 무슨 관계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이론 가운데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는 개인이 심리적 불안을 극복하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심리전략이다. 프로이트의 방어기제 가운데 부정(Denial)은 외부의 실재나 사건을 아예 인정하려 하지 않는 가장 미성숙한 메커니즘으로 알려져 있다.

취재를 하다 보면 다양한 취재원들과 접촉하는데 이처럼 사실을 아예 외면하고 인정하지 않아 정상적인 사실관계 확인이 불가능한 경우가 꽤 있다.

또 하나의 사례도 있었다.

양양군의 천혜 경관을 자랑하는 죽도해변. 국가철도공단은 지난해부터 이곳 백사장 바로 뒤편 철도부지 3만4,230㎡를 활용한 대형 리조트 개발에 나서고 있다. 민간제안 공모를 통해 A컨소시엄을 사업시행사로 선정했으며 최장 50년간 국유지를 임대해준다. 공공을 위해 활용해야 하는 해변과 백사장, 국유지 등을 민간업체가 장기간 사유화하는데 문제가 있다고 보고 양양을 찾아가 취재를 시작했다. 주민들의 반발은 생각 이상이었다. 현장에서 만난 40대 남성은 본인은 서울 출신이고 양양 죽도해변에서 10여년간 생활해왔다고 소개하며 대형 리조트 건설을 결사 반대했다. 이 남성의 안내로 마을 이장과 인근 상인들의 다양한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이후 사업 시행사 A컨소시엄 관계자와 인터뷰했다. 관계자에게 주민들의 리조트 건설 반대 의견을 물었더니 대뜸 현장취재를 도와준 40대 남성을 거론하며 “그 남성은 주민이 아니다”고 말했다. 주민등록 주소지가 양양이 아니라는 뜻인것 같았다. 그 관계자는 재차 “그 남성은 주민이 아니고…실제 마을 주민들이 사업에 반대한다는 이야기는 전혀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A컨소시엄 관계자를 취재한 후...양양 죽도해변 일대 현남면 두창시변리 마을은 지역 주민과 관광객 800여명에게 ‘철도공단 난개발 반대 서명’을 받아 지난 9월3일 국가철도공단, 양양군청, 국민권익위원회 등에 발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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