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학교 입학할 때가 되니까 집에서 '형이 졸업한 후에 학교에 가면 안되겠느냐'고 하더라고요. 월사금을 못 내 칠판에 이름 적히고 교무실 불려가는 날도 허다했죠. 정말 공부하고 싶어서 학비 면제 혜택을 주는 전교 학생회장까지 했었습니다"
금쪽같은 막내 아들에게 중학교 입학을 미루라고 할 수 밖에 없었던, '말로 다 설명하지 못할' 가난이었다.
가난은 '공부'하려는 그의 발목을 번번이 붙잡았고, 이를 뿌리치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렇게 폭풍같은 시절이 지났다. 월사금 미납자로 칠판에 적혀 있던 그 이름은 이제 우리나라 최고 에너지 공기업 사장으로 불린다.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 간다'는 말을 안고 열심히 달려온 덕분이다. 긴 여정 끝에 다음달 퇴임을 앞둔 박형덕 한국서부발전 사장을 만나 그간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인터뷰 신형철 정치부국장
■ 이제 곧 퇴임이다. 내려놓을 시점이니 마음이 복잡할 것 같다="흔히 말하는 '시원섭섭하다'에 가까운 심정이다. 처음에는 '시원'과 '섭섭'의 비중이 50대50 정도였는데 점점 퇴임이 가까워지니 '시원'이 70~80, '섭섭'은 10~20 가량 으로 바뀌었다"
■ 2021년에 취임해 3년동안 서부발전을 이끌었다. 성과는 무엇인가="맨 처음 부임하고 보니 당시 6년 전 안전사고로 누적된 적자와 대외 부정적 시각으로 직원들의 사기와 자신감이 극도로 저하돼 있는 상태였다.
일단은 '안전 부실기업'이라는 오명을 털기 위해 안전 최우선 경영에 집중했다. 또 신재생인 IGCC (석탄가스화복합발전) 설비의 중앙급전 전환으로 구조적인 적자를 해소했다. 전국 단위의 사업장도 확보해 2022년엔 정부 경영평가에서 12개 에너지공기업 가운데 유일하게 A 등급 받았다"
■ 발전업계가 많이 어려운 상황이지 않나= "그렇다. '위기'이다. 하지만 '도전'의 시기이기도 하다. 중대재해라는 잠재적 리스크가 상존해 있고, 석탄발전 수익성 저하, 에너지 전환을 위한 대규모 투자가 불가피하기 때문에 전기요금이 현실화되기 전까지는 한전 적자를 분담할 수 밖에 없는 등 경영여건이 결코 녹록치 않다.
여기에 정부의 혁신정책(생산성제고·관리체계 개편· 민관협력강화) 이행을 포함한 강력한 경영 드라이브로 직원들의 피로도가 누적된 것도 사실이다"

■ CEO로서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조직을 잘 어우르면서 경영도 잘 해 내야하고, 전체적인 에너지업계의 상황도 고려해야 하니 당연히 고민의 무게가 컸다. 그래도 하나 하나, 차근 차근 풀어 가니 성과로 나타났다.
일단 구성원들의 다양한 요구사항이나 불만을 해소할 수 있는 소통의 장을 마련해서 건전한 조직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전 사업소 간부직원 대상 연찬회, 젊은 직원들의 솔직한 의견을 청취한 CEO 콘서트, MZ세대로 구성된 청렴컨설팅 등을 벌였는데 직원들의 반응이 좋았다. 덤으로 국민권익위원회의 공기업 평가에서도 전년보다 2단계 상승한 공공기관 최고등급을 받았다. 경영적 측면으로는 2년 연속 흑자 달성에 성공했는데 시황 대비 42% 수준의 유연탄 구매를 비롯해 발전원가 절감 에 힘쓴 결과였다. 출자회사 경영개선을 통해 약 1,000억원의 지분이익 역시 확보했다"
■ 국내외 신(新) 시장 개척도 주요 업적으로 꼽히는데 ="단기적으로는 발전원가 및 에너지 수요 절감을추진하고, 중장기적으로는 신시장 진출을 준비했다. 2022년 오만 태양광사업 수주에 이어 세계 7번째 규모의 UAE 아즈반 태양광사업 수주에 성공했다. 오만과 아즈반 태양광 두 사업 모두 국내 기자재 기업 참여조건으로 향후 우리 기업들이 중동에 진출하는데 교두보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국내에서는 반도체 클러스터와 연계한 용인 1GW 가스복합 부지를 확보했다"
■ 여러 성과 속에 '흙수저 성공신화'를 쓴 주인공으로도 자주 회자된다="말 그대로 정말 '흙수저'였다. 말도 못할 정도로 어려웠다. 평창에서 초교 5학년때 원주로 이사를 왔는데 중학교에 갈 나이가 되니까 부모님이 '형이 졸업할 때까지 입학을 미루면 안되겠느냐'고 하시더라. 우여곡절 끝에 사립중학교에 가긴 갔는데 맨날 월사금을 못내서 칠판에 내 이름이 적히고, 교무실로 불려갔다. 사립중학교이다 보니 시험 평균이 90점 넘어가면 특별장학생이라고 해서 다음 학기 학비를 면제해줘서 버텼다. 어느 학기엔 89점을 받아서 장학금을 놓쳤다. 학교에 다니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전교학생회장을 하면 면제가 된다고 하더라. 원래 내성적인 성격인데 학교 다니려고 어쩔수 없이 출마했고 정말로 학생회장이 됐다. 이후 고교에 수석입학해서 고등학교 3년간은 장학생으로 다니면서 졸업했다"

■ 어린 나이에 쉽지 않은 길을 걸었다. 삶의 원동력은 무엇이었나="글쎄. 그 시절을 보내놓고 보니 흔히들 말하는 '헝그리정신'이었던 것 같다. 나는 '흙수저'이고, 이런 내가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할까를 고민해보니 오로지 공부하는 길, 그것 밖에 없더라. 등록금이 상대적으로 싼 국립대에 와서도 어떻게든 졸업해서 취직해야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헝그리 정신'으로 가난을 극복했다면, 날 키운 건 '꿈'이다. 아직도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 간다'는 앙드레 말로의 글귀를 잘 보이는 곳에 적어서 둔다.
'언젠가 내 시대가 올 것이다'라는 그 꿈이 현재의 이곳으로 나를 이끌었다"
■ 한국전력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다. 많은 선택지 중에 한전을 택한 이유는="처음엔 대기업에 취업했었다. 이후 7~8개월 정도 근무하다가 한국전력에 합격해서 이직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내 꿈을 펼치고, 내가 성장하려면 공기업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는 소위 말하는 '스카이'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고, 집안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스펙에서 밀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공기업에서는 사기업에 비해 어느정도 기회를 보장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입사동기가 100명이었는데 한전이 워낙 큰 회사이다 보니 그 안에 명문대생도 많았고, 전국적으로 뛰어난 인물들도 많았다. 그런데도 나는 항상 '최연소' 타이틀을 달았고, 최선두를 놓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내 판단이 옳았다.
업무성과도 중요하지만 조직 내에서도 두루두루 어울리면서 '내 편'을 많이 만들었다. 이런 측면에서는 강원도 출신이라는 점이 큰 도움이 됐다. 통상 강원도 출신이라고 하면 순수하고, 근면성실하다고 생각을 하더라. 이런 여러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 강원 출신 인사가 한전 본사에서 상임이사직(부사장)에 오른 것은 처음이었다. 지역에서도 많은 화제가 됐다="1985년에 한국전력공사에 입사했고, 영업처장, 홍보실장, 구매처장 등 본사 주요보직과 경기지역본부장 등을 두루 경험했다. 2018년 7월에 기획부사장(상임이사)으로 선임됐는데 지역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다 보니 축하와 격려 인사를 많이 받았다.
한전 재직시절의 성과로는 전기요금 체계 개편을 꼽고 싶다. 전력사업 123년만에 원가 기반의 전기요금 체계 개편을 완전히 수행했다. 전기요금 연료비 연동제를 도입해 전력원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연료비를 합리적으로 전기요금에 반영했고, RPS(신재생에너지의무공급비용), ETS(온실가스 배출권 거래비용) 등을 기후환경요금으로 별도 고지하는 등 원가 기반의 투명하고, 예측가능한 전기요금 체계 개편을 이뤘다고 자부한다. 이는 한전과 전력그룹내 발전사의 재무리스크를 획기적으로 낮추고 안정적 경영의 기반이 됐다"
■ 앞으로의 계획은 = "그동안 에너지 분야에서 축적한 전문가적 역량과 경험을 국가와 사회를 위해 쓰고 싶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마다하지 않겠다"
박형덕 한국서부발전사장은 평창 출신으로 원주 육민관고와 강원대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1985년 한국전력공사에 입사해 홍보실장, 경기본부장, 기획부사장 등을 지낸 후 2021년 4월 한국서부발전 사장에 취임했다.
정리=원선영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