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법정칼럼] 판사도 똑같이 당해봐야 한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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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진 춘천지법 원주지원 부장판사

형사사건 담당 법관으로서 자기 판결에 관하여 보도된 언론기사를 종종 접하게 된다. 그중 많은 기사의 댓글에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내용이 있는데, ‘대한민국 판사가 오히려 범죄를 부추긴다’, ‘판사(혹은 그 가족)가 똑같이 당해봐야 된다’라는 식이다. 피고인에 대한 형량이 약하다는 불만의 표출로서, 충분히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전체 판결 중 1%도 되지 않는 소수의 판결만이 언론의 관심을 끌고, 언론은 그 속성상 대중의 관심을 끌 만한 사건에 주목하는 것이 당연하며, 그런 사건은 대중의 공분을 자아낼 만한 사건인 경우가 보통이다. 그러다 보니 댓글의 주류가 함무라비 법전 식의 강력한 응징을 바라는 방향으로 치우치는 건, 기사 선정 단계에서부터 어느 정도 운명 지워진 듯하다.

위와 같은 댓글의 진정한 의도는, 판사가 마치 피해를 ‘직접 당해본 것처럼’ 피해자의 입장을 헤아릴 수 있어야 된다는 요구라고 이해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요구는 충족 가능한 것일까? 어떤 접근이 필요할까?

우선 사람은 누구나 자기 위주의 편향이 있다는 점이 하나의 장애요소로 작용한다. 스티븐 핑커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라는 저서를 통해, 피해자와 가해자는 서로 방향은 다르지만 같은 정도로 이야기를 왜곡하는 도덕화 간극이 존재함을 언급한 바 있다. 더욱이 판사는 통상 사건이 발생하고 최소 수개월, 심하면 몇 년이 지난 후에야 그 사건을 다루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진술까지 마치 서로 다른 사건을 겪은 사람들처럼 판이하다면, 판사로서는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공감’과 ‘감정이입’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저명한 신경과학자인 로버트 M. 새폴스키는 ‘행동’이라는 저서에서, ‘공감’이 고통받는 타인을 안타깝게 느끼는 마음이라면 ‘감정이입’은 그 타인처럼 느낄 줄 아는 마음이라고 설명한다. 예를 들면 청소년은 감정이입의 전문가로, 타인의 처지가 된 듯 느끼는 정도가 심하다 못해 아예 타인이 되어버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10대 시절 또래 무리에 속하고 싶어 선생님 몰래 술·담배를 따라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던 경험이 있었다면, ‘감정이입’의 뜻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진실 발견에 있어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법관 능력의 한계를 인식하고, 자기중심마저 잃은 채 타인이 되어버리는 감정이입보다는 자기중심과 원칙을 유지하는 공감을 우리가 더 지향해야 할 방향으로 설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즉, 법관에게 요구되는 바람직한 자세란, 일방에 대한 맹목적 감정이입보다는, 피해자와 가해자, 때로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보편적 가치에 대한 공감 능력을 갖추는 일이 될 것이다. 수년간 성폭력에 시달려오다 의붓아버지를 살해한 피고인에 대한 형사사건을 예로 들면, 핵심적 기본권인 생명을 박탈당한 피해자뿐만 아니라, 수년간 가정 내 성폭력으로 고통받다가 이를 벗어나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피고인 및 이 판결을 향후 행동 준칙으로 삼게 될 유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반응까지 미리 헤아리는 것이 법관에게 요구되는 공감 능력이 아닐까 한다.

어느 선배 법관이 이임사를 통해, 법관들에게 시간 나면 판례 공부보다 인문학 서적을 한 권이라도 더 읽으라고 다소 과장되게 당부했던 건, 바로 이런 공감 능력을 더 열심히 키워야 된다는 의미가 아니었을지 곰곰이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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