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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강원 인물' 최규하]말단 과장서 '국가 수반' 올라… 경제·외교·안보 위기마다 종횡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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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

1억달러 군사원조 이끌고 석유파동땐 위기 해결
'할 말 하는 외교관' 수완 발휘 국제 무대 맹활약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 후 취임 신군부에 의해 사임
다양한 사람 만나 업무 매진 '일하는 대통령' 재평가

◇세종특별자치시 대통령기록관에 전시돼 있는 최규하 대통령 기념 조형물. 최 대통령의 행적과 업적을 쓴 유리를 겹쳐 얼굴로 형상화한 것이 이채롭다. 세종특별자치시=허남윤기자

강원 원주 출신 대통령 최규하(1919~2006년)의 삶과 행적을 우리 강원인은 얼마나 기억할까.

대한민국은 1948년 8월15일 정부 수립 후 현재까지 13명의 대통령을 배출했고, 권한대행까지 합할 경우 80년여 역사에서 고작 20명에 불과하다.

이중 강원 출신은 원주가 고향인 현석(玄石) 최규하 대통령이 유일하다.

경성사범대 영문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미 군정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발탁된 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농림부에서 외교부로 옮기며 외교관의 길을 걸은 최 대통령은 북한의 외교 공세에 맞대응 하며 외교무대를 누볐다. 외무장관에 이어 국무총리를 거친 관료로서 대통령 자리에 오른 최 대통령의 행적은 가벼운 것이 아니다.

실패한 대통령, 비운의 대통령이란 오명과 측은함의 대명사로 인식되곤 한다. 하지만 그의 삶 하나하나 살펴보면, 전쟁의 피폐된 대한민국을 일으켜 세우고 세계 무대에서 통상국가로 발돋움하는데 최 대통령의 손때가 묻지 않은 곳이 없었다.

1980년 5월18일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한 신군부를 억제하지 못한 비판에 시달려야 했고, 결국 당시 보안사령관인 전두환의 쿠데타에 밀려 8개월여만에 임기를 마무리했다.

최규하 대통령은 비운의 대통령일까. 실패한 대통령일까.

현대사의 변곡점에서 뜻하지 않은 상황을 맞으며 행정수반 자리에 오른 최 대통령을 우리는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대통령 최규하가 걸어간 길과 그가 남긴 삶의 의미를 되짚어 보자.

◇1980년 6월10일 춘천에서 열린 제9회 전국소년체전 개회식에 참가해 축사를 하는 최규하 대통령. <대통령기록관 제공>

<1>대한민국 대통령 최규하

최규하 대통령은 공직에 입문한 후 말단 과장에서 외교부 장관과 대통령 특보, 국무총리, 대통령 권한대행을 거쳐 제10대 대통령에 오른 입지적인 인물이다.

1년이 채 안되는 대통령 재임기간으로 인해 비운의 주인공으로 낙인됐다. 하지만, 그의 행적을 따라가다보면 대한민국 건국 이래 위태로운 순간에 그의 번뜩이는 재치와 기지는 우리나라를 전쟁 후 위기상황에서 통상국가로 발돋움하는데 늘 그가 보였다. 역사의 변곡점에서 최 대통령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강원도사 발간 소식에 최규하 대통령이 ‘강원정기우일신(江原正氣又日新)’이라는 휘호로 축하했다. <대통령기록관>

■탁월한 외국어 실력으로 발탁

최규하 대통령은 서울대 사범대학 조교수로 교편을 잡던 중, 미 군정 시절이던 1946년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공직으로 들어섰다. 외국어 실력이 출중한 것이 발탁의 배경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농림부 양정과장으로 발탁됐다. 의식주가 온전치 못했던 시절, 무엇보다 먹는 문제가 심각했던 당시로서는 매우 중요한 자리였다.

30대 3년차 공무원인 그가 같은 해 국제식량기구(FAO) 아주지역 미곡위원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가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후 외무부 통상국장으로 자리를 옮겨 국제무대에서 동방의 작은 국가인 대한민국을 조금씩 알리는데 뛰어든다.

최 대통령은 20년여 기간 외교관으로 봉직하면서 능숙한 외국어 실력과 외교관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건국 초기 우리나라의 외교기반을 쌓은 것이 최규하의 가장 행적이라 할 수 있다.

1959년 9월 41세의 나이로 외무부 차관에 임명됐다. 1963년 외무부 본부대사를 겸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고문에 오르면서 아시아태평양이사회(ASPAC·아스팍) 설립구상을 가지고 교섭에 임했다. 제1차 회의가 서울에서 열렸고, 최 대통령은 초대 사무총장에 오르게 됐다.

ASPAC은 우리나라가 주도해 창설한 국제회의로, 1972년까지 이어졌다.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국무총리 임명장을 받은 최규하 대통령(당시 국무총리) <대통령기록관>

◇최규하 국무총리 임명장. 박정희 대통령 직인이 찍혀있다.<대통령기록관>

■외교 투사 최규하

1967년 6월말 외교부 장관으로 국제사회에서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대한민국을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조용한 외교' 기조를 넘어서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을 통한 국력 배양이 다면외교와 통일의 지름길'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조직을 강화하는데 역점을 뒀다.

외교의 성과는 수출로 이어졌다.1970년 10억 달러 수출을 달성하면서 통상국가로서의 초석을 쌓았다는 평가다.

저자세의 외교가 아닌, '할 말 하는 적극적인 외교관'으로의 수완도 발휘했다. 1·21사태(북한의 청와대 침투사건)와 미국 푸에블로호 납북사건 등 굵진한 외교사안에 미국에서 내한한 사이런스 벤스 특사와 담판을 통해 미군의 증편을 요구했고, 1억 달러의 군사원조를 이끌어낸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벤스 특사는 "최 장관의 애국심과 쇠고집, 인내력, 그가 계속 뿜어내는 담배연기에 손을 들었다"는 말로 최 대통령을 칭송했다.

이 때 두 사람의 만남은 한미 양국의 연례회의로 이어지면서 '한미연례안보협의회'의 효시가 된다.

최 대통령은 외교관 시절 통일문제에도 적극 나섰다. 1971~1975년 박정희 대통령의 외교담당 특별보좌관으로 중임을 맡아 1972년, 1973년 각각 남북조절위원회 서울측 위원으로 방북했다.

대통령특사로 7회에 걸쳐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에티오피아 등 24개국을 친선방문 하는 등 국제무대를 종횡무진 했다. 특히 두 차례에 걸친 석유 파동에 산유국을 잇따라 방문, 석유를 확보하면서 위기를 해결한 능력도 기억해야 한다. 석유 파동의 위기를 넘기지 못했다면 1970년대 경제성장은 뒤로 밀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 같은 외교관으로의 능력을 인정받아 1975년 12월19일 국무총리 서리로 임명됐고, 이듬해 3월13일 국무총리로 취임했다. 1979년 3월 국무총리로 재신임을 받은 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자 대통령 권한대행을 거쳐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최규하 대통령이 1980년 2월22일 원로들로 구성된 국정자문회의 첫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대통령기록관>

■민주적 절차에 의한 대선을 준비한 대통령

최 대통령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있던 1979년 12월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장에 피선됐고, 같은 달 6일 대통령에 선출됐다. 대통령으로 피선되자마자 '긴급조치 9호 해제'를 의결했다. 그해 12월21일 대통령에 취임했다.

제10대 대통령에 오른 그는 민주적 선거절차에 의한 새 정부 출범을 약속했다. 당초 최 대통령의 임기는 6년이었지만, 결국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 착실하게 힘을 길러온 군부에 정권을 이양하고 8개월여 만에 사임하게 된다.

짧은 재임 기간 그가 할 일은 많지 않았다는 인식이 강하다. 건국 이후 가난한 나라의 국민을 위해 쌀을 가져오고 통상국가로 나아가기 위해 국제무대를 주름잡았던 능력있는 외교관으로서는 힘에 부치는 듯 했다. 과연 그럴까.

세종특별시에 있는 대통령기록관에서 살펴본 최 대통령의 행적은 세간의 평가와는 상당히 달랐다. 그의 업무일지는 빼곡했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가장 바쁠 때는 시간 단위로 쪼개 면담 일정을 이어갈 정도였다.

당시 대통령비서실이 펴낸 '최규하대통령연설집(1979~1980년)'을 보면 그는 참 다양한 장소에서 국민들을 만났다. 연설문집은 박정희 대통령 국장 조사(弔辭)부터 비상시국 담화, 새마을운동 10년사, 춘천에서 열린 제9회 소년체육대회 개회식 인사말 등 행적을 낱낱이 기록한 자료였다.

혼란의 시기 국정 안정을 위해 나섰지만, 권력을 노리는 군부의 견제는 견디기 힘들었다. 결국 8개월 만에 하야를 결정, 대통령직에 물러나게 된다.

함종한 전 강원도지사는 "최규하 대통령은 신군부에 일방적으로 쫓겨난 것으로 볼 수 없다. 자신의 임기를 보장받는 것 이상으로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늘 염두해 두셨다. 그렇기에 대통령 권한을 넘길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1980년 8월16일 청와대에서 대통령직 사임을 발표하는 최규하 대통령. 그는 "새로운 사호를 건설하는 역사적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결정"이라고 밝혔다. <대통령기록관>

훗날 신군부에 의해 자행된 5공 청산 청문회에서 그는 대통령 권한을 넘긴 것에 대한 진술을 거부했다. "그 사유를 밝히지 않는 것은 전직 대통령이 증언에 응하는 악례를 남기지 않는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2004년 7월20일 부인 홍기 여사를 먼저 보낸 그는 2006년 10월 22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자택에서 의식을 잃은 상태로 발견돼 서울대병원으로 후송됐으나, 이날 오전 7시37분 서거했다. 향년 87세.

장례는 국민장(國民葬)으로 치러졌고,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원수묘역에 안장됐다.

생가터에 들어선 원주역사박물관 1층에 최 대통령의 일대기를 전하는 '현석실'이 있다. 모교인 원주초교에 최규하 기념관(현석관)이 세워졌고, 2012년 10월2일 최규하기념사업회가 조직됐다. 그를 잊지않고 기억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기사는 강원특별자치도 지역 언론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아 취재하였습니다.

◇1980년 8월17일 청와대를 떠나는 최규하 대통령과 부인 홍기 여사. 사진 속 최 대통령의 밝은 표정과 수행원들의 굳은 표정이 대비되는 모습이 이채롭대. <대통령기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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