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oo에게. 그해 가을과 겨울 내게 있어 화진포(花津浦)는 오직 여름이야. 바다와 민물이 만나는 군인 휴양지에서 피어나는 해당화가 떠오르는 곳이야. 그리고 햇살이 반짝이는 백사장. 백사장을 적시는 일을 멈추지 않는 파도. 낮에는 백사장의 인명구조 망루에 올라가 수영을 하는 사람들을 살피고 밤이 찾아오면 오색 불빛이 해당화처럼 피어나는 디스코텍에서 생맥주를 나르던, 휴양지로 파견 나간 병사. 나는 휴전선의 어두운 초소에서 총을 든 채 비무장지대를 바라보며 그 이야기를 듣고 또 들었어. 얘기만 들어도 그 모든 장면들을 마치 내가 직접 체험한 것처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지. 해당화처럼 아름다웠다는 아가씨들에 관한 이야기는 더더욱 그러했지. 그러다 어둠이 개고 아침이 밝아와 초소에서 철수를 할 때 내려다보이는 화진포는 밤의 이야기와 달리 늘 서늘하고 낯설었지. 하지만 나는 소원했지. 다음 여름이 어서 빨리 돌아와 화진포의 해당화 숲으로 파견 나가는 행운이 내게 다가오기를.

Goo, 이름마저 아름다운 화진포를 둘러싼 이야기는 많아. 아주 옛날에는 바다였다가 오랜 세월 속에서 바다와 격리된 호수가 바로 화진포야. 그러니까 옛날에는 고깃배가 드나들었다는 것이겠지. 이화진이라는 마음씨 고약한 사람이 살았는데 시주 나온 건봉사 스님을 문전박대한 결과로 마을이 물속으로 가라앉았다는 전설도 있지. 그래서 그의 이름을 따 화진이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전설은 그다지 믿기지 않아. 그보다는 근현대사로 들어와 이곳의 풍광이 아름다워 많은 별장들이 일제강점기에 지어졌다는 사실에 더 흥미가 당기는 건 어쩔 수가 없어. 광복이 되고 미국과 소련의 군정기가 시작돼 남북이 38선으로 갈라지자 화진포는 북쪽의 땅이 되었어. 그러자 화진포의 별장들은 조선로동당 간부들의 여름 휴가지가 되었고 김일성 역시 가족들을 데려와 여름을 보낸 모양이야. 김일성 별장이란 명칭은 그렇게 생겨난 거겠지. 이후 6·25전쟁이 끝나고 화진포가 남쪽의 땅으로 바뀌면서 이번엔 이승만, 이기붕 별장이 들어선 거야. 이승만 별장은 1954년에 완공하여 1960년까지 사용, 이후 폐허로 방치되다 철거된 뒤 다시 지어 육군관사로, 1999년 다시 복원해 역사적 자료와 유품전시관으로 이용하다가 2007년 보수를 거친 뒤 지금은 고성군에서 이승만 대통령 화진포기념관으로 운영되고 있어. 해당화가 피고 떨어지는 동안에 벌어진 화진포 별장들의 역사가 흥미롭지 않아?

Goo, 화진포는 그 후 군인과 군인 가족들의 휴양지가 되었어. 해수욕장에 민간인들은 출입할 수 없었어. 나는 그 사실을 화진포가 내려다보이는 휴전선 산꼭대기에서 들었어. 파견 근무를 다녀온 병사는 밤마다 내게 그 이야기를 들려줬지. 은근히 자랑 섞인 목소리로 장군의 딸들과 함께 보낸 여름을 노래했지. 나는 투광등 불빛 아래서 날카로운 가시를 드러내고 있는 철책선의 윤형 철조망을 노려보며 가끔 질문을 던지곤 했어. 대북방송과 대남방송이 어지럽게 뒤얽혀 있는 밤의 휴전선에서. 고가초소에 설치된 탐조등 불빛이 맹수의 혀처럼 비무장지대를 휘젓고 다니는 155마일 휴전선의 어느 작은 초소에서. 산양 한 마리가 눈 덮인 철책선을 넘어 남쪽으로 귀순하기도 했던 그 겨울산에서 들었던 화진포 이야기는 얼어버린 볼을 덥혀주었던 자그마한 난롯불처럼 따스했었지.

Goo, 앞에서 말했다시피 이제 화진포에는 고깃배가 들어오지 않아. 고깃배가 없는 이름뿐인 포구야. 호수와 바다 사이엔 해수욕장이 있고 배가 드나들기엔 너무 얕은 개울이 모래를 적시고 있어. 투망을 어깨에 걸친 사내들이 바다와 민물이 만나는 곳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보니 배는 아니지만 그래도 물고기들은 호수로 돌아오는 모양이야. 어디까지 떠나갔다가 돌아오는 물고기들일까. 아, 화진포로 돌아오는 것은 물고기들뿐만은 아냐. 해당화 대신 갈대들이 에워싸고 있는 호수로 철새들이 날아오는 모양이야. 아직 본격적인 겨울이 아니어서 고니는 볼 수 없었지만 대신 청둥오리들이 한데 모여 떠다니고 있었어. 아주 작은 배들처럼. 겨울을 나기 위해 먼 북쪽에서 날아와 한 계절 머무르는 거겠지. 그래서일까. 내 눈엔 저 화진포란 곳이 물고기들과 새들의 포구란 생각이 들었지. 방파제와 등대는 없어도 세상에 이런 포구 하나쯤은 있어야 되는 거 아닐까. 아마 추운 겨울이 찾아오면 화진포는 철책도 경계선도 필요 없는 철새들과 물고기들로 더 붐비겠지. 물속과 물 밖이 흥청거리겠지. 그런 생각을 하니 저 산꼭대기에서처럼 다시 마음속에 따스한 난롯불 하나가 피어나고 있더라.

그래도 Goo, 내게 있어 화진포는 언제나 해당화가 피었다가 떨어지는 여름이야. 물론 나는 휴전선이 있는 산꼭대기에서의 소원처럼 다음 여름에 군인 휴양지로 파견 나가지 못했어. 소원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되었지. 화진포를 지나 몸과 마음이 아픈 병사들이 찾아가 머무는 포구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진 거야. 그곳에서 한 번도 가지 못한 여름 화진포를 조금씩 잊어가고 있었지. 꿈속에서나마 가끔 흩어지는 영상들을 떠올릴 뿐이었지. 백사장의 높은 망루, 거기 앉아 있는 빨간 모자를 쓴 병사, 뜨거운 모래를 맨발로 걸어 바다로 뛰어가는 장군의 딸들, 그 모든 낮의 열기를 식혀주는 밤의 디스코텍. 소나무 그늘 속에 자리한 이승만, 김일성, 이기붕 별장...... 그렇게 나는 화진포를 한 번도 가보지 못하고 화진포를 떠났던 거야.

Goo, 살아 있는 모든 존재들은 어느 시기가 되면 포구를 찾아가는 것 같아. 포구에서 머물다가 포구를 떠나는 것 같아. 다음 포구를 찾아서. 오래전에 포구의 역할을 접은 화진포에는 이제 물고기들과 새들만 찾아온다고 그랬잖아. 그래서 든 생각인데...... 어쩌면 화진포는 지구라는 푸른 별의 포구들을 떠돌다 사그라진 이들의 영혼이 물고기와 새의 몸을 빌려 찾아와 해당화 꽃잎처럼 떠다니는 곳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런 곳이라면 좋겠어. 그런 포구 하나 이 세상에 있다는 거 근사하지 않나. 어느 병사의 기억 속에 자리한 화진포는 아직 여름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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