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 강원도]이상과 현실이 충돌하는 ‘인간적 고뇌’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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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사북항쟁 후 탄광촌 배경
한국 현대사 중요한 국면 비춰

현길언 작가의 장편소설 ‘회색도시’는 1980년 4월 사북항쟁 이후의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탄광촌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생생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사북항쟁 45주년을 맞아 소개하는 이 소설은 금정광업소라는 탄광촌을 무대로 개인과 집단, 이상과 현실, 희망과 좌절이 끊임없이 충돌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설의 중심에는 탄광촌 ‘검은도시’를 이상적인 ‘푸른 도시’로 바꾸겠다는 신념으로 부임한 신임 소장 인경진이 있다. 한때 막장에서 직접 탄을 캐며 고된 노동을 경험했던 그는 고향 금정광업소의 변화와 재건을 꿈꾸며 돌아온다. 그러나 그가 마주한 현실은 냉소와 불신으로 가득하다. 광부들과 지역사회는 그를 여전히 ‘검은 도시’의 일부로 여길 뿐, 그의 이상에 공감하거나 함께하려 하지 않는다.

작품은 사북항쟁의 여파가 여전히 남아 있는 탄광촌의 모습을 통해, 이념과 현실의 충돌 속에서 벌어지는 인간 군상의 삶을 탐구한다. 특히, 사북항쟁 당시의 갈등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광부들과 지역사회가 겪는 혼란과 분열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이는 단순히 특정 지역의 이야기를 넘어,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국면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작가는 인간이 품은 이상과 욕망이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왜 좌절되는지를 탐구한다. 인경진은 ‘푸른 도시’라는 이상을 내세우며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려 하지만, 그의 노력은 지역사회의 내재된 구조적 모순과 인간적 한계 속에서 번번이 좌절된다. 그의 이상은 현실 속에서 갈등과 냉소로 왜곡되며, 결국 개인적 희생으로 이어진다. 이를 통해 작가는 집단적 이데올로기와 개인적 이상 사이의 긴장을 묘사하며, 독자들에게 인간 사회의 복잡성과 한계를 성찰할 기회를 제공한다.

인경진의 이야기는 사북항쟁의 물리적 충돌 이후에도 남아 있는 정신적 갈등과 인간적 상처를 보여준다. 탄광촌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불안정하고, 그들이 가진 분노와 절망은 소설 전반에 걸쳐 배경처럼 흐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경진이 추구하는 ‘푸른 도시’의 꿈은 독자들에게 이상주의의 가치를 묻는 동시에, 그것이 현실과 충돌할 때 드러나는 인간적 고뇌를 보여준다.

작가는 소설에서 사북이라는 지명을 직접 언급하지 않지만, 사북항쟁의 연장선에서 이어지는 갈등과 변화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풀어낸다. 이는 소설이 단순히 특정 사건을 재현하는 것을 넘어,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맥락을 은유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회색도시’는 집단적 이데올로기와 개인적 삶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통해, 인간과 사회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또한, 탄광촌이라는 특수한 배경을 넘어서 어디에서나 벌어질 수 있는 인간의 욕망과 정치적 갈등을 보편적으로 탐구한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특정 시대와 지역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문제들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1993년 발표된 이 소설은 출간 당시부터 큰 주목을 받았다. 경제적 발전과 민주화라는 구호 아래, 인간적 행복과 가치를 놓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이 소설은 인간 본연의 욕망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허구와 억압을 냉철하게 성찰했다. 작가는 이러한 문제들을 탄광촌이라는 소외된 공간을 통해 효과적으로 풀어냄으로써 독자들에게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오늘날에도 이 소설은 많은 독자들에게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꿈꾸는 이상은 과연 무엇이며, 그 이상은 현실에서 어떤 방식으로 구현될 수 있는가? 또한, 그 과정에서 개인과 사회는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가? 회색도시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답을 찾으려는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소설은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인간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독자들에게 여전히 중요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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