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압록강 2,000리를 가다]침묵 속에서 피어난 조선족 농아 화가 박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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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각을 잃고 세상을 얻은 화가…잉크와 종이로 세상과 대화하다

◇조선족 농아인 화가 박영철씨. 중국 단동시=김남덕 기자
◇◇조선족 농아인 화가 박영철씨와의 인터뷰는 필담으로 진행됐다. 중국 단동시=오석기기자

5월의 단둥은 초여름의 문턱에 걸쳐 있었다. 바람은 부드럽고, 강물은 조용히 흐르며 도시를 감쌌다. 취재진을 태운 차는 도시의 외곽, 길 옆 한 건물로 들어섰다. 그 곳에는 조선족 청각·언어장애인 화가 박영철의 집이자 작업실이 있었다. 창가엔 흰 커튼이 햇살에 일렁인다. 그곳에선 종이 냄새와 잉크 향이 은은히 섞여 흘렀다. 이 조용한 공간에서 그는 펜 하나로 세상을 그리고 있었다. 그와의 대화는 필담으로 진행됐다.

1973년 중국 지린성 판스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무렵 감기약을 과다 복용한 뒤, 청각을 완전히 잃고 언어장애까지 겪게 됐다.

“그때부터 세상의 소리는 모두 닫혔습니다. 웃음도, 고함도, 바람소리도, 새소리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죠.” 그는 그날을 또렷하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저를 안고 다급히 지린(吉林) 판스(磐石)에서 출발해 훙치진(红旗镇)과 시골 마을을 거쳐 도시 병원으로 데려갔습니다.” 그 길에서 처음으로 버스, 기차, 고층 건물을 보게 됐고, 그 장면들은 그의 마음속에 강하게 남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소리를 잃은 그날, 그는 이세상을 그림으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운명이 한 쪽 문을 닫았지만, 다른 창을 열어준거죠.(웃음)”

그림에 대한 관심은 말그대로 운명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혼자 나뭇가지로 흙바닥에 기차를 그리며 놀았던 그는, 어느날 부터 말이 아닌 그림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표현하기 시작했다. “우리 집안에는 화가는 물론이고 예술가도 없었어요. 하지만 저는 그때부터 그림이 제 언어였고, 세상과 연결되는 유일한 연결고리였습니다. ” 어머니는 그런 아들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말을 하지 못하는 아들에게 스케치북과 볼펜을 건네며 말했다. “하고 싶은 대로 그려보거라.” 그 한마디는 박영철의 인생을 바꿔 버리는 결정적인 순간이 됐다.

◇조선족 농아인 화가 박영철씨가 자신의 작업실에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중국 단동시=오석기 기자

청각장애를 지닌 그는 일반학교가 아닌 특수학교에 다녔고, 교실 칠판 위에 선생님의 요청으로 교훈과 꽃, 인물을 매일 손으로 그려 넣었다. 그 작은 칠판은 그의 첫 번째 전시장이었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선생님들은 졸업을 앞둔 그에게 장춘대학 미술학과 진학을 권유했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가난한 형편 탓에 대학 진학은 꿈도 꿀 수 없었고, 생계를 위해 공장에 들어가야 했다. 그곳에서 무려 17년간 기계와 싸우며 노동자의 길을 걸었다. “펜을 손에서 놓은 채 매일 8시간, 소리 없는 기계 소리 속에 살았어요. 그 침묵은 고요했지만, 때로는 너무 깊고 차가웠습니다.”

단둥의 슈광(曙光) 자동차 그룹에서 조립공으로 일하고 있던 2008년의 어느날 인터넷에서 우연히 본 한 장의 펜화가 그의 운명을 뒤흔들었다. 그 그림은 동물의 털 한 올, 인물의 눈빛까지 섬세하게 표현한 작품이었다. “그 순간,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어요. 이건 반드시 내가 해야 할 일이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치다오거우(七道沟)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노인, 눈사슴, 소나무, 눈 내리는 장면 등을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작품을 완성해 교회 벽에 걸어두고 일상을 이어오던 어느날 우연히 찾은 교회에서 자신의 그림이 감쪽같이 사라진 사실을 알게 된다. “교회 목사님이 말씀하시길 한국에서 온 다른 목사님께서 제 그림을 한국으로 가져 갔다는 겁니다.(웃음) 그 일이 없었다면 박영철의 펜화도 없었을 것입니다. ”

그는 공장을 그만두고, 펜을 다시 들었다. “전부 독학이었습니다. 누구에게도 배우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았어요. 오로지 매일, 스스로와 싸우며 그렸습니다.” 처음의 그림들은 엉망이었다. “선이 흔들렸고, 비율도 맞지 않았어요. 하지만 하루도 펜을 놓지 않았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지 매일 증명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 해 가을, 제3회 전국 펜화대전에 첫 작품을 제출했다. 병가 중이었지만, 마감 직전 세 작품을 보냈고, 그중 ‘기념’이라는 작품이 우수상을 받았게 된다. “수상자들은 모두가 최고의 펜화가들이었고 장애인은 제가 유일했습니다. 조선족으로서 매우 자랑스럽고 영광스럽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때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림은 내 인생의 전부가 될 수 있겠다고…. 더 이상 취미가 아니라, 삶 그 자체가 될 수 있다고 말이죠. ”

◇조선족 농아인 화가 박영철씨가 자신의 작업실에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중국 단동시=오석기 기자

그가 가장 아끼는 작품은 ‘온화한 가족’이다. 늑대 가족을 펜 하나로 그려낸 이 작품은, 단순한 동물화가 아니다. “처음엔 늑대의 위엄만 담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건 허영이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아 찢어버렸고, 다시 그릴 수밖에 없었죠.” 그는 시골집 2층, 난방도 되지 않는 공간에 자신을 가두고 밤늦게까지 늑대의 생존과 가족애를 상상하며 수없이 펜을 움직였다. 스스로 북방의 외로운 늑대가 된 것이다. “늑대의 삶에서 인간의 모습을 봤습니다. 고통과 사랑, 투쟁과 연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그 안에 있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박영철의 손놀림은 한없이 진지했다. “펜 끝에서도 리듬이 느껴져야 해요. 쇠처럼 단단하지만, 물처럼 부드러운 선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한 달 넘게 매달린 끝에 완성한 작품은 그를 ‘펜화 작가 박영철’로 세상에 알리는 대표작이 됐다.

그는 스스로 청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는다. “제가 말하지 않아도, 그림이 말해줄 겁니다. 동정이 아닌 실력으로 평가받고 싶어요.” 그렇게 말한 그는 수첩을 가슴에 꼭 안았다. “이 안에는 수천 개의 생각이 담겨 있어요. 모두, 그림으로 나올 겁니다.” 중국펜화연맹의 회원, 하이난성 펜화학회 이사 등으로 활동하는 그의 작품들은 주제의 우수성과 함께 표현의 사실성과 화면구도가 극찬을 받으며 중국에서 열린 각종 펜화대전과 글로벌 애니메이션 게임 축제 등 국내외 미술대전에서 다수 수상했다. 또 ‘미술보’, ‘신중국미술가대’, ‘중국 신펜화’, ‘중국무역보’, ‘국제일보’ 등 중국의 유명 매체에서 그의 작품을 소개하기도 했다.

조선족 박영철씨는 농아인 화가다. 오로지 세상과 소통을 시각과 촉각으로 하는 작가는 펜으로 작품을 만들고 있다. 그의 그림은 세상과 소통하는 창구다. 중국 단동시=김남덕기자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은 그의 작품은 절반 이상이 판매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경제적으로 여유롭진 않지만, 그가 걷는 예술의 길엔 흔들림이 없다. “예술은 평생을 바쳐야 하는 일입니다. 단기 성과가 아닌, 깊은 인내와 열정이 필요합니다.” 박영철은 여전히 펜을 들고, 침묵 속에서 세상을 그린다. 그리고 그 그림들은 오늘도 조용하지만 강한 울림으로, 이 시대를 향해 수많은 메시지를 건네고 있다. 그는 말한다. “가슴 가득한 열정을 펜에 담아, 더 많은 사람들과 더 많은 감동을 나누고 싶습니다. 여러분들도 자신의 꿈에 믿음을 가지세요.” 중국 단동시=오석기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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