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대체 우리는 어느 나라 국민인가요?”
태평양전쟁 강제징용 피해자와 유족들이 지난 30여년간 수없이 외쳐온 말이다. 2025년 6월 우리는 아직도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고 있다. 국가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동원된 수많은 조선인 피해자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돌아오지 못한 죽음조차, 살아남은 고통조차 마땅히 기록되지 못했다.
1930년대말부터 1940년대초까지 일본은 아시아 전역에서 전쟁을 확장하며 조선을 병참기지로 삼았다. 강원도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젊은이들이 홋카이도 탄광과 규슈 군수공장, 남양군도 전장까지 강제로 끌려갔다. 사랑하는 처와 결혼식을 올린 지 이틀 만에 동원된 故권오설(동해·1943년 사망)씨는 땅콩기름 공장에서 하루 12시간씩 중노동에 시달리며 콩깻묵밥으로 생을 연명했다. 슬하 4남1녀를 둔 27세의 가장이었던 故편춘식(양구·1952년 사망)씨는 1942년 징용 영장을 받고 탄광에 투입, 해방 후에도 진폐 후유증 등으로 고통 받다 생을 마감했다. 이들은 군인이 아니었지만, 전쟁을 떠안고 살아야 했다.
총을 들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이들의 고통이 보훈의 범주 밖에 머물러야 하는가. 우리 사회는 그 질문부터 다시 고민해야 한다. 전쟁의 참상은 전장에서만 벌어지지 않았다. 삶의 터전에서, 낯선 광산에서, 공포 속에서 무수히 되풀이됐다. 그 고통을 기록하지 않고 외면한 채, 보훈을 말할 수 있을까.
19일 태평양유족회의 오랜 노력으로 5,500여점의 강제동원 사료가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 기증됐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이름이 비로소 역사적 기록으로 남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지 8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국가는 태평양전쟁 희생자와 유족회를 보훈 대상자로 인정할 것인지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2023년, 정부는 대법원 판결(2013다61381)을 이행하지 않고 민간 재단을 통해 일본 기업 대신 배상금을 지급하는 '제3자 변제' 방식을 선택했다. 이에 태평양전쟁 유족들은 “우리가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진심 어린 사죄”라고 말했다. 명예는 타인의 입으로 대리할 수 없다. 이는 존엄과 책임의 문제다.
태평양전쟁 유족회의 활동은 대부분 사비로 이뤄진다. 1990년 결성 이후 정부의 실질적인 지원 없이 일본 기업과의 소송을 이어갔고, 일본에서 숨진 징용 희생자 513명의 유해를 국내로 옮기기도 했다. 그러나 피해자와 유족회의 명예 회복을 향한 정부의 발걸음은 여전히 더디기만 하다.
미래를 살아갈 세대가 이 문제를 기억하고 책임의 맥락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언제든 비슷한 방식의 회피가 반복될 수 있다. 역사 교육, 시민의식, 제도 개선은 모두 이 기억의 토대 위에 서 있어야 한다.
잊히고 지워진 이름들을 공식적으로 기록하는 일, 그곳에서부터 정의는 시작된다.
국가가 기억하고 예우해야 할 대상은 누구인가. 전장에서 싸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보훈의 대상에서 배제되어야 한다면, 전쟁의 그늘에서 죽어간 이들은 어디에 포함되어야 하는가.
오늘의 우리가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를 되짚는 일, 그것이 바로 공공의 역사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