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정연수의 ‘탄광촌 기행’]석공 다니면 보지도 않고 딸 준다

‘첨단산업+석탄문화 세계유산화’
(7)광업소의 위계와 광부의 계급: 석탄공사, 탄좌, 탄광

◇대한석탄공사 인력 모집 광고

■석공 다니면 보지도 않고 딸 준다=한국의 탄광촌은 계급과 위계, 권력과 착취가 중층적으로 얽힌 공간이었다. ‘석공’, ‘탄좌’, ‘탄광’, ‘건업’, ‘하청’, ‘쫄딱구덩이’ 등의 명칭만으로도 탄광업계 내부의 위계가 드러난다. 정부에서는 광업개발 조성 자금을 융자하거나 탄광업을 구분할 때 ‘석탄공사-대단위 탄좌-민영탄광’으로 구분했다. 이 3대 축 사이에 ‘건업’으로 불리는 하청탄광이 있었으며, 작은 갱구를 얻어 채굴에 나선 ‘쫄딱구덩이’도 운영되었다.

‘석공 다니면 보지도 않고 딸 준다’라는 유행어가 있었는데 이는 같은 광업소 중에서도 대한석탄공사의 높은 위상을 상징한다. 광업소가 수십 개씩 운영되는 삼척시나 태백시에서 장성광업소나 도계광업소를 두고 광업소라고 부르지 않고 ‘석공’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런 위상과 맞닿아 있다.

탄좌가 운집한 정선군에서는 사북광업소라는 명칭 대신에 동탄(동원탄좌 약칭)이라고 불렀고, 정암광업소라는 명칭 대신에 삼탄(삼척탄좌 약칭)이라고 불렀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석탄공사나 탄좌의 소속은 광업소라는 명칭을 붙였지만, 그 외는 광업소가 아닌 ‘탄광’이라고 이름 붙였다. 민영 탄광 중에서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규모를 자랑하는 함태탄광, 강원탄광, 한보탄광, 흥국탄광(경동상덕광업소 전신) 조차 광업소 대신에 ‘탄광’으로 명칭을 붙인 것은 그 때문이다. 광업소의 하청에선 광업소란 명칭을 붙이지 못하고, ‘건업, 기업, 산업’ 등으로 기업명을 붙였다. ‘서울건업’ 같은 회사는 광부의 숫자도 많았지만, 장성광업소 하청이었으므로 ‘광업소’나 ‘탄광’라는 명칭을 붙일 수 없었다. 하청 광부들이 스스로 ‘개청부’라고 자조하는 것 역시 광업소의 위계를 드러낸다.

◇흰색 안전모를 쓴 관리직, 노란색 안전모를 쓴 생산직.

■석공은 왕족, 탄좌는 귀족=해방 이후 일본인이 경영하던 적산탄광은 모두 미군정청이 인수받았다가 한국 정부로 넘어왔다. 탄광 대부분 정부 직할이어서 탄광의 국유화 과정은 어렵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한창인 1950년 11월 1일, 장성·도계·화순·영월·은성·함백·문경·단양·경주 등 9개 광업소를 중심으로 대한석탄공사를 창립한다. 대한석탄공사는 우리나라에서 ‘공사’ 형태로 설립된 최초의 기업이라는 상징성을 지닌다. 휴전 이후 석공에 경영난이 발생하자 1954년 대통령이 포고문을 통해 국군지원단을 파견하는 등 직접 개입에 나서기도 했다.

정부가 수립한 1955년의 탄전종합개발 5개년 계획, 1957년의 탄전종합개발 10개년 계획 수립의 핵심에는 대한석탄공사가 있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석탄공사 사장을 ‘총재’라고 불렀는데, 군파견단장과 상공부 장관을 지낸 김일환은 “석탄공사 총재는 장관급”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석탄공사 사장을 장관급으로 예우한 것은 석공의 위상과 석탄 증산의 시급성을 보여준다. 이는 일반적인 공사(公社)와 달리 국영기업으로서 석탄공사가 운영되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석공이 왕족이라면, 탄좌는 귀족에 해당한다. 석공만으로 생산량을 감당할 수 없자 정부는 민영탄광을 적극적으로 개발하기 위해 탄좌(炭座) 설립에 나선다. 1961년 석탄개발임시조치법을 통해 대단위 탄광으로 묶어 개발하는 탄좌 신설 특별법을 제정했다. 탄좌라는 명칭은 연간 30만 톤 이상 생산할 수 있는 규모의 광구를 통합한 대규모 탄광에 정부가 특별하게 부여한 호칭이다.

1962년도부터 동원탄좌(사북광업소), 삼척탄좌(정암광업소), 회동탄좌, 나전탄좌, 우전탄좌(명주광업소), 성주탄좌, 강릉탄좌, 대성탄좌(문경), 호남탄좌, 평창탄좌 순으로 10개의 탄좌가 설립되었다. 탄좌에는 시설투자액 75%를 장기 저금리로 융자하는 혜택이라든가, 철도와 운탄도로 개통 등의 기반시설까지 정부가 지원했다. 예미-정선 구간 및 충남 남포선이 탄좌의 석탄수송을 위한 산업 철도로 개설되었다. 강력한 지원책에도 불구하고 성공한 탄좌는 동원탄좌(사북읍 사북광업소)·삼척탄좌(고한읍 정암광업소)·대성탄좌(문경시 문경광업소) 3개소에 불과한데, 그중 두 곳의 시설이 정선군에 남아 탄좌의 역사를 증거하고 있다.

◇동원탄좌(사북광업소)

■백바가지 몰아내기 투쟁으로 얻은 광부의 인권=1980년대 초반까지 쌀과 현찰을 섞어 급여로 지급하는 광업소들이 많았다. 석탄공사 장성광업소나 도계광업소에서는 좋은 쌀을 값싸게 공급하면서 ‘석공쌀’은 탄광촌 최고의 쌀브랜드가 되었다. 장성광업소가 월급봉투 뒷면의 <가정통신문>에다 배급쌀 전표를 싸전(정미소)이나 이웃들에게 되팔면 문책과 배급 중단 처벌을 하겠다고 경고할 정도로 석공쌀은 인기있는 쌀브랜드였다. 이에 비해 영세탄광에선 품질 낮은 쌀을 들여와 광부들에게 비싼 값으로 공급하면서 인건비를 착취했다. 농촌에서는 영세탄광에서 구입하는 값싼 쌀을 ‘광산미’라고 불렀다. 영세광업소 광부들은 ‘누군 석공쌀 먹고, 누군 광산미 먹나’라는 불평을 쏟기도 했다.

민영탄광보다는 석탄공사 내의 위계가 더 엄격했다. 군 장성 출신이 석탄공사 사장으로는 부임하면서 군대식 질서가 공고해진 탓도 있다. 1995년까지 11명의 군 장성 출신이 사장으로 임명되었다. 석탄 증산이 최고의 경영목표이던 시절, 책임량을 다하지 못하면 상급관리자가 하급관리자를 구타하는 것이 일상이었고, 광부는 입갱 전에 오리걸음이나 선착순 뛰기 같은 단체 기합을 받기도 했다.

대한석탄공사의 위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안전모 색상이다. 장성광업소와 도계광업소 등 석공에서는 흰색(관리직), 노란색(노무직), 파란색(내빈) 등 색깔로 신분을 구분했다. 관리자와 사무직은 사원이라 칭했지만, 광부들은 사원이 아니라 종업원으로 불렸다. 이런 엄격한 위계는 사택가 전체로 번지면서 관리자의 아내까지 사모님이라 불리며 위세가 등등했다. 위계에 의한 위화감이 심화하면서 대규모 파업으로 번지기도 했다. 1986년 삼척의 경동광업소에서는 차별대우 철폐를 요구하는 대규모 파업이 전개되었으며, 1987년엔 태백의 장성광업소에서 ‘백바가지 몰아내기’ 투쟁까지 전개됐다. 백바가지란 흰색 안전모를 뜻하는 은어로, 광업소 내에서 관리자 계층을 상징했다. 관리직과 생산직 간 위계의 차별을 없애자는 노동투쟁이 성공하면서 석공 관리직의 안전모가 노란색으로 바뀌었고, 광부들은 ‘생산직 사원’이란 명칭을 얻을 수 있었다. 흰색 안전모 철폐는 위계에 의해 억압받던 광부들의 인권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계기였다.

◇정연수 탄전문화연구소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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