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은 설계하고 지방은 줄서는 나라
“지방이 사라지면 대한민국의 미래도 없다.” 지방소멸이 더 이상 추상적인 위협이 아닌, 당장 눈앞의 현실이 되고 있다. 강원 양구와 정선, 경북 봉화와 영양 등 이른바 ‘소멸 고위험군’에 속한 지역만 해도 열 손가락이 넘는다. 이런 지역을 관통하는 남북 9축 고속도로 구상이 정책 논의 테이블에 올랐다. 총사업비 14조 8천억 원. 경제성 논란은 피할 수 없지만, 그보다 더 묵직한 질문이 있다. 이 나라에 지방이라는 존재는 얼마나 중요한가.
수도권 인구, 전체 절반 차지
지난 10일, 김경수 지방시대위원장이 공식 취임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경남지사를 지낸 김 위원장은 균형발전 이슈에 누구보다 정통한 인물이다. 그는 “수도권 집중을 넘어 새로운 성장 전략을 설계할 시점”이라며, 이재명 정부의 ‘5극 3특 전략’ 실행에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수도권과 충청, 동남, 대경, 호남의 5대 초광역 경제권, 그리고 강원·전북·제주의 3대 특별자치도가 그 뼈대다. 그의 어조에서 느껴지는 건 단순한 선언이 아닌 위기의식이다. 수도권 인구가 전체의 절반을 넘긴 상황에서, 매년 5만 명 가까운 인구가 지방을 떠난다. 인구뿐만 아니다. 일자리, 대학, 병원, 문화, 기업 등 모든 것이 서울로 향한다. 지방은 지금 ‘일방적 소멸’을 겪고 있다. 그 속에서 지방 정부들은 간절하다. 강원도는 이번 제3차 고속도로 건설계획에 접경지역을 관통하는 5개 노선의 반영을 노리고 있다. 그중 남북 9축 고속도로는 강원 양구에서 출발해 경북 봉화, 청송, 영천을 지나 울산과 부산까지 잇는 방대한 구상이다. 해당 노선을 따라 분포한 10개 시·군 중 절반은 이미 소멸 ‘고위험군’으로 분류된다.
사업의 경제성은 낮지만 정책적 당위성은 절실하다. 단순한 도로가 아니라 ‘존재를 잇는 길’이기 때문이다. 국토교통부가 아니라 국가 전체의 비전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문제다. 사실 균형발전은 수십 년간 반복된 국가 과제였다. 김대중 정부의 지방분권, 노무현 정부의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 이명박 정부의 광역경제권 구상,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혁신센터, 문재인 정부의 지역균형뉴딜까지 이름만 바뀌었을 뿐 지방의 운명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지역에 실질적 권한 이양을
이유는 분명하다. ‘지방을 위해’라는 명분 아래 중앙이 설계하고, 지역은 공모에 줄을 서야 했다. 권한은 없고 책임만 주어진 자치, 그런 구조에서 지속가능한 자립은 요원했다.
김 위원장이 주도하게 될 ‘5극 3특’ 전략은 이 같은 방식에서 탈피해야 한다. 자치와 자립을 가능하게 하는 실질적 권한 이양, 지역 스스로 기획하고 책임지는 체제로 나아가지 않으면 또다시 헛바퀴만 돌게 될 것이다. 해외 사례도 주목할 만하다. 일본은 ‘지방창생’ 정책을 통해 도쿄 중심 구조를 바꾸려 했다. 대도시 이주자에게 현금과 주택, 직업을 통합 지원하며 지방행을 유도했다. 독일은 연방제를 바탕으로 교육·복지·산업 정책의 실질적 권한을 지방정부에 위임했다. 프랑스는 대도시-농촌의 이분법이 아닌 중소도시 육성 전략으로 인구를 분산시켰다. 이들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지방을 ‘지원’이 아닌 ‘주체’로 본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하나 중앙은 ‘신뢰하고 맡기는 결단’을 내렸다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김 위원장의 앞에는 단순한 행정조정이 아닌 ‘국가 시스템 개조’라는 과제가 놓여 있다. 우선 중앙-지방 간 실질적 협의체계를 구축하고, 5극 3특 권역별 전략을 지역 주도형으로 설계해야 한다. 그리고 SOC(사회간접자본)와 의료·교육 등 생활기반 투자를 정책 우선순위에 두고, 분명한 권한 이양과 재정 분권을 병행해야 한다. 특히 고속도로처럼 장기적이고 상징적인 사업은 경제성만으로 판단하지 말고, 지역 유지 여부와 연결된 ‘국가 지속 가능성’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지방이 붕괴되면, 수도권의 경쟁력도 무너진다. 서울만의 대한민국은 결코 지속가능하지 않다. 이제는 말이 아니라 결단과 실행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