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제에서 의병 100여명이 일본군 금성수비대와 접전을 벌였고 의병 3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1908년 1월17일). 인제 북방 60리 서화면 령촌에서 의병 150여명이 인제수비대 및 주재소 순사와 교전했다. 의병 18명이 전사하고 25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포로 2명, 총기 8정, 탄약 140발 등을 잃었다(2월5일). 이후 백담사를 근거지로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충돌이 이어졌다. 인제 가면리, 남면 유목정, 상수내리, 관대리, 마두리, 기린면 엄수동 현창리, 사평동 등을 비롯해 요소요소에서 교전이 있었으니, 인제 전 지역이 전장화(戰場化)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3월30일). 인제로 이동한 이강년부대가 일본군 500여명의 공격을 받아 수십명의 사상자를 냈고, 이 싸움에서 일본군 250명을 격퇴시켰다(4월13일). ▼인제지역 항일 의병활동 일지 중 일부다. 1908년부터 광복 때까지 인제에서만 60여차례 항일 전투 기록이 있다. 인제는 깊이 우거진 숲과 험준한 지형, 하천을 보유한 데다 산포수 150여명이 있어 의병활동 및 독립투쟁의 마지막 보루가 된 지역이다. 산악을 이용한 기습전으로 약점을 파고들어 일본군도 인제만 오면 위압감과 공포에 떨었다고 전해진다. 이강년부대가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와 싸움을 할 때 인제주민들은 전투식량을 공급하며 적극 도왔다. ▼민간단체 ‘인제 독립운동가찾기본부’는 지난 6년간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과 국립중앙도서관 등 관계기관을 돌며 이 같은 의병 활약상을 수집했고 103명의 독립운동가를 찾아내는 성과를 거뒀다. ▼광복 80주년인 올해 우리 민족의 암울과 환희로 굴곡진 한국 근현대사가 다시금 조명받는다. 인제군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과 업무협약을 맺고 동경대전 등 동학 유산의 가치를 재조명해 기념물 설치와 순례길 조성 등 선양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는 신념 하나로 보여준 강인함과 의리, 조국을 지킨다는 헌신과 투지를 기억하며, 선열들의 얼을 되살려내고 선양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