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조선왕조실록·의궤 톺아보기]대중매체 속 실록이야기 ⑧역린(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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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 존현각에 자객이 침입한 사실을 적고 있는 정조실록4권, 정조 1년 7월 28일의 기록.

“왕좌를 지키기 위해 군주가 짊어져야 할 무게는 얼마나 되는가”라는 질문은 조선왕조 500년 내내 반복되던 울림이었다. 하지만 정조에게 그것은 아버지 사도세자 그리고 이복동생 은전군 이찬의 죽음을 통해, 또 자신을 향하고 있는 칼끝을 통해 매번 되묻는 형벌과도 같은 것이었다. 영화 ‘역린’은 정조에 대한 시해 시도 사건을 1777년 7월 28일 하룻밤에 벌어진 일로 그리고 있다. 물론 경희궁 존현각에서 벌어진 그날의 일들은 실록에도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대내(大內)에 도둑이 들었다. …갑자기 들리는 발자국 소리가 보장문 동북쪽에서 회랑 위를 따라 은은하게 울려왔고, 어좌(御座·임금의 자리)의 중류(中霤·집의 한가운데 있는 방) 쯤에 와서는 기와 조각을 던지고 모래를 던지어 쟁그랑거리는…(정조실록4권, 정조 1년 7월 28일)” 사건 현장에 도착한 도승지 홍국영은 반정을 꾀하는 세력들이 꾸민 변란이라고 규정하고, 경비를 강화하는 한편, 궁궐 수색에도 나선다. 하지만 이미 밤이 깊었고, 주변에 풀이 무성하게 자라 괴한들을 잡는 것은 실패로 돌아간다.

영화에서는 암살조직의 수장 광백이 키워낸 자객 수십명이 정조가 머물며 책을 읽던 존현각에 침투, 병사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시해 직전까지 가는 모습 보여주지만 실상은 괴한들이 낸 소리와 그들의 흔적을 확인하는 정도였다. 실질적인 위협은 없었지만 왕이 머물던 곳, 그 턱밑까지 누군가 침입했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대궐을 발칵 뒤집어 놓는 일이었다.결국 정조는 사건이 발생 8일만인 8월6일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정조는 범인 검거에 소극적이던 우포도 대장 이주국을 파면하고 구선복을 책임자로 임명하며 수사를 독려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한번 자객이 창덕궁에 침입을 시도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전략) 어느 사람이 곧장 경추문(景秋門) 북쪽 담장을 향해 가며 장차 몰래 넘어 가려고 하므로…추격하여 잡았는데, 병조를 경유하여 포도청(捕盜廳)으로 보냈고…홍술해의 아들 홍상범이 몰래 사사(死士)를 양성하여 반역(反逆)하려고 도모…(정조실록4권, 정조 1년 8월 11일)” 여기서 경추문은 창덕궁의 서문으로 이들의 침입 시도는 명백히 정조를 향한 것이었다. 드디어 꼬리가 잡히는 순간이었다. 체포된 자객은 전흥문으로, 영화 ‘역린’에서 조정석이 연기한 을수와 가장 근접한 인물이다.

◇영화 ‘역린’에서 궁녀 강월혜 역으로 출연한 정은채 배우.

정조 암살시도의 배후에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임오화변(1762년)의 주범 홍계희의 아들 홍술해, 손자 홍상범 부자가 있었다. 홍계희 가문은 정조의 즉위를 극구 반대하는 무리에 앞장섰으며, 정조 즉위 후 대규모 숙청으로 인해 가문의 권력과 영향력이 무너지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에 정조를 살해하고 은전군 이찬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이들 때문에 공모 사실에 밝혀지지도 않은 은전군이 목숨을 잃게 된다. 영화에서 처럼 시해 계획을 세우는 과정에 강월혜라는 궁녀가 가담한 사실이 밝혀지기도 하지만 정조의 반대편에 서있던 왕대비 정순왕후의 개입 정황은 실록에서 찾을 수 없다. 다만 정순왕후가 노론 벽파를 비호하면서 정조를 견제한 것은 역사 속에서 확인되는 사실이기 때문에 정황상 개연성은 있어 보인다. 이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귀양길에 오르게 된다. 정유역변은 정조의 왕권강화를 경계한 반대 세력의 저항이자, 사도세자 문제로 얽힌 구세력과 신왕권 간의 첨예한 대립을 상징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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