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물괴’는 중종 재임기간의 혼란스러운 시대 배경과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물괴’ 목격담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기록에 등장하는 ‘물괴’는 단순히 기이한 생명체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었다. 기괴하고 괴이한 물건(귀물·鬼物)을 통칭하는 개념으로 쓰였다. 심지어 자연재해나 기상이변, 사회적 혼란까지도 ‘물괴’의 범위에 속하는 것이었다.
중종 즉위 6년째인 1511년, 역대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는 종묘에 벼락이 떨어지는가 하면, 제사에 쓸 돼지가 도망가고 제물로 바칠 소가 사당 안에 들어와 죽는 불길한 일(중종실록13권, 중종 6년 5월 8일)들이 이어졌다. 이 때 종묘 담장 밖에 불이 번져 민가 67채가 불에 타기도 했다. 심지어 개를 닮은 짐승이 경복궁 문소전에 출몰해 공자를 모신 묘전(廟殿·문묘와 대성)으로 향하는 것이 목격(중종실록13권, 중종 6년 5월 9일)되기도 했다. 대들은 이러한 이상 현상들이 반드시 원인이 있을 것으로 여겼다.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는 변고(?)는 중종 9년(1514년) 부터 수도 없이 벌어졌고, 중종11년(1516년)에는 문소전에 있던 신위판(神位板·조상이나 고인을 기리는 제사에서 고인의 영혼이 머무는 자리 또는 상징물)이 실수로 깨지는가 하면 궁궐 곳곳에서 괴수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실록은 이러한 기묘한 현상들을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닌, ‘정치적 불안 신호’로 받아들였다.

1527년(중종 22년)에 이르러서 이러한 현상은 정점을 이룬다. 얼마나 많은 사건, 사고가 벌어졌는지 중종은 신하들에게 빠른 보고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을 질책하기도 했다. “역병으로 사람이 죽는 일이나 모든 재이(災異·재앙이 되는 괴이한 일) 같은 사건은 지방에서는 신속하게 보고하고 있으나, 수도에서는 관례상 문서로 보고하지 않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시기에 맞춰 문서로 보고할 사항을 해당 관서에 일러 처리하도록 하라.(중종실록58권, 중종 22년 3월 18일)” 햇무리가 빈번하게 나타나는가 하면 동궁과 대전에 불로 지진 쥐의 사체를 걸어 놓는 흉측한 일도 벌어진다. ‘작서(灼鼠)의 변’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왕세자(후에 인종)를 겨냥한 것으로 흉흉한 궐내 분위기에 그야말로 기름을 끼얹는 사건이었다.

급기야 영화 ‘물괴’가 모티브를 가져온 사건도 연달아 벌어진다. 비린내를 풍기며 경복궁에 나타난 괴수의 이야기가 그것. “생기기는 삽살개 같고 크기는 망아지 같은 것이 취라치(나각을 부는 군사) 방에서 나와 서명문(西明門)으로 향해 달아났습니다.(중종실록59권, 중종 22년 6월 17일 임술 1번째기사)” 실록은 군사들이 괴수를 보고 놀라 고함을 질렀다는 묘사와 함께 실재한 사건임을 강조한다. 이 일로 인해 중종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대신들은 “괴이함은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된다”며 이를 반대한다. 대낮에 괴물이 나타나 대비의 침전을 마구 두드리는가 하면 잡동사니로 희롱하는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결국 경복궁으로 이어를 하게 된다. 괴수가 나타난지 한달만의 일이었다. 공교롭게도 중종의 어머니인 정현왕후 윤씨는 경복궁 환궁 이후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 실체와 상관없이 물괴는 궁중 암투와 정치적 위기를 상징하는 공포의 실체로 작용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