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춘천에서 태동한 성시화운동이 53주년을 맞았다. 1972년 김준곤 목사와 춘천지역 기독교계가 합심해 시작한 이 운동은 단순한 복음 전파를 넘어 교회 공동체 회복, 사회 개혁, 도시문화의 정화 등 전인적 도시 변혁을 지향했다. ‘복음으로 도시를 거룩하게’라는 대의를 품고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을 실천해 온 국내외 최초의 모델로 평가된다. 이렇게 출범한 이 운동은 ‘춘천발 세계행’의 여권을 얻어 이젠 전 세계 121개 도시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16세기 칼빈의 제네바 개혁에서 이 운동의 원형을 찾는다. 무질서와 퇴폐로 얼룩졌던 제네바가 칼빈의 신앙적, 사회적 개혁으로 평화로운 도시로 거듭났다. 칼빈이 두 번이나 제네바에서 추방됐듯이 거룩함을 말하는 일에는 언제나 조롱과 저항이 따랐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단보다 무질서를 더 두려워했다”는 그의 신념은 결국 도시의 생리를 바꿨다. 신학자 몬터가 “제네바 역사에서 모든 길은 칼빈으로 통한다”는 평가를 내놓기도 했다.
제네바 개혁은 성시화운동의 방향성에 깊은 영감을 주었다. 성시화운동은 초기에 전국에서 참여한 대학생들과 춘천 기독교인이 함께한 대규모 대회로 출발했다. 이후 성시화신문 창간, 성시주간 운영, 성시 아카데미 개최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확장돼 왔다. 교회 테두리를 넘어 가정과 학교, 일터, 직장, 시장 한복판까지 그 영향력이 점점 확대됐다. 도시 전체를 품은 사랑의 실천이며 도시의 DNA를 송두리째 바꾸려는 전방위적 시도로 이어지고 있다.
지역사회와의 협력으로 진화된 부분도 주목하게 된다. 통일·평화도시 연구를 비롯해 행정, 교육, 경제, 의료, 복지, 문화, 예술, 체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복음의 무게를 도시 전체의 삶에 녹여내려는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 257호째 발행한 ‘성시신문’ 지면마다 빼곡히 담긴 목소리는 이런 실천으로 읽게 된다. ‘기독교인뿐 아니라 비기독교인도 함께 복을 누리게 한다’는 이 시도는 이미 사회 구조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며 도시의 심장을 건드리고 있다.
성시화운동 출범과 함께 내놓은 ‘성시노트’에 성시의 미래상이 소개된다. “성역화된 춘천에는 거지, 도둑, 뇌물, 부정부패, 퇴폐풍조, 불신풍조, 매음, 폭행 등 일체의 사회악이 자취를 감춘다. 성시 마크가 붙은 상품은 세계 시장의 총아로 등장한다.” 성시노트의 언설은 결코 허상이 아니다. ‘거지와 도둑이 사라진 성역화된 도시’, ‘성시 마크가 세계시장에 통용되는 경제 윤리’는 오늘날 ESG 담론과 맞닿아 있다. 정결한 기업, 깨끗한 정책, 투명한 시민의식이 하나의 브랜드로 귀결될 수 있다는 예견이다.
하지만 오늘날 성시화운동이 마주한 시대적 도전은 결코 가볍지 않다. 이 시대는 칼빈이 마주했던 제네바보다 더 교묘하고, 더 파편화돼 있다. 소돔과 고모라를 연상케 하는 물신주의, 쾌락주의, 감각주의 그리고 윤리의 실종은 이제 통계나 여론조사 따위로 설명되지 않는다. 죄가 일상이 되고, 무질서가 시스템처럼 굴러가고 있다. 극단적 이기와 탐욕이 도심의 맥박처럼 작동하고 우리의 일상에 깊숙이 침투해 있다. 칼빈의 제네바 개혁이 그 시대의 병폐를 정면 돌파했던 것처럼 성시화운동은 도덕적 해체와 영적 공황이라는 병증 앞에서 더 강력한 변화를 일으켜야 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춘천의 성시주간은 그래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7일부터 펼쳐지는 다양한 성시주간 행사는 단순한 지역적 활동을 넘어서 이 시대의 깊은 병폐를 치유하고 회복할 수 있는 신앙적, 사회적 움직임을 더욱 촉진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성시화운동은 그 자체로 사회의 완전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큰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마음을 모을 때 제2의 제네바는 반드시 현실이 될 수 있다. 제네바가 그랬듯이, 춘천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