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빛이 차오르고 고향의 길목마다 송편 냄새가 번지는 계절이다. 명절이라는 말이 주는 따스함은 누구에게나 평등해야 할 것 같지만, 현실은 언제나 그렇지 않다. 한가위, 그 풍요의 이름 앞에 올해도 또 누군가는 통장 잔고를 확인하며 울분을 삼킨다. 수천억원에 달하는 체불 임금, 그리고 추석 연휴 직전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고단한 숫자들. 최근 3년간 강원지역 2만명에 달하는 근로자들이 1,230억원의 임금을 받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2022~2024년 도내 임금 체불 사업장은 7,080곳, 피해 근로자는 1만9,534명이다. 총체불액은 1,230억9,200만원으로 나왔다. 올해도 1월부터 8월까지 1,713개 사업장에서 4,741명의 노동자들이 3,391억4,000만원의 급여를 받지 못했다.
임금을 떼인 일용직 노동자에게 한가위 상차림이 무슨 의미일까. 한국 사회에서 한가위는 단순한 명절을 넘어선다. 집으로 돌아가는 행렬 속에는 단지 가족 상봉 이상의 가치가 담겨 있다. 부모님의 안부, 아이들의 웃음, 조상의 은덕에 감사하며 제사를 올리는 그 모든 행위가 공동체 회복의 의례이자, 인간적인 삶의 최소 조건에 대한 확인이다. 그런데 이런 소중한 명절을 앞두고 임금을 받지 못해 가족에게 빈손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것은 단지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수치다.
왜 해마다 명절이 다가올 때면 임금 체불 문제가 되풀이되는가. 표면적인 원인은 자금난, 경기 침체, 사업 부진 등이겠지만, 이면에는 구조적인 무책임이 자리 잡고 있다. 상습적 체불 사업주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 불완전한 법적 제도, 실효성 낮은 강제집행 체계는 체불을 막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허용하는 환경을 만들었다. 특히 건설업과 운송업 등 파견, 일용직이 많은 업종에서는 노동자들의 생계가 한 사람의 양심에 의존하는 구조 자체가 비정상이다. 최근 고용노동부와 검찰이 합동 청산대응반을 꾸리고, 상습 체불 사업주에 대한 구속수사 원칙을 내세운 것은 고무적인 변화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수사의 칼날은 예외 없이 공정해야 하고, 법의 테두리는 돈이 적게 걸린 노동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돼야 한다. 임금은 노동의 대가이자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탱하는 최소한의 권리다. 국가가 이를 보호하지 못한다면 헌법이 말하는 인간다운 생활은 공허한 문장이 될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정치의 역할을 묻게 된다. 정쟁으로 얼룩진 국회, 말의 잔치에만 능한 정치인들 앞에서 현실의 고통은 그저 뉴스의 단신으로 지나친다. 정치는 국민의 삶을 지키는 수단이어야 하며, 그 본령은 권력 투쟁이 아니라 약자의 목소리를 제도화하는 데 있다. 추석이라는 국민 모두의 명절 앞에서 정치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국민에 대한 배신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자녀에게 용돈을 줄 수 없어 외면하고, 고향 어르신께 빈손으로 찾아갈 일을 걱정하고 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자책과 분노, 그리고 무력감이 교차한다. 이들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는 임금 체불에 대한 사후 조치가 아니라 사전 예방이어야 한다. 사업장 규모와 상관없이 임금 지급 보증 제도를 강화하고, 체불 시 국가가 우선 지급 후 구상권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책임의 주체를 명확히 해야 한다.
노동자 스스로 권리를 주장하기 어려운 구조에서는 행정이 먼저 다가가야 한다. 노동청이 현장으로 가고, 현장에서 수사를 진행하며, 법원이 신속히 판결을 내리는 것. 이것이 국가가 존재해야 할 이유다. 한가위는 나눔의 시간이고, 함께함의 기쁨을 확인하는 날이다. 그러나 그 기쁨은 최소한의 조건이 충족될 때에야 의미를 갖는다. 임금을 받지 못한 이들에게 명절은 가장 가혹한 거울이다. 국가와 사회가 이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우리는 더 단단한 제도와 더 따뜻한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명절의 의미는 결국 사람이다. 따뜻한 밥 한 그릇, 웃는 얼굴 하나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그리고 그 출발은 정당한 임금이다. 올 한가위, 우리 사회가 그 당연한 출발선에 모두를 세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