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강원일보 창간 80주년 기획 대담]길 위에서 길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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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념 “길은 道이며 연결의 학문”
김풍기 “효율성보다 공존의 길로”
이순원 “양보가 손해 아닌 사회 만들자”

대담 = 권혁순 강원일보 논설주간

창간 80주년을 맞은 강원일보는 지난 14일 오대산 자연명상마을 내 ‘정념(正念·사띠)의 숲’과 ‘동림선원’에서 ‘길’을 화두로 한 특집 대담을 마련했다. 길은 지도상의 선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람과 사유를 잇는 방식이라는 전제에서 대화는 시작됐다. 이날 자리에는 퇴우 정념 월정사 주지스님, 김풍기 강원대 교수, 이순원 소설가가 함께했다. 진행은 강원일보 권혁순 논설주간이 맡았다. 참가자들은 효율의 그늘과 강원의 정체성, 공존의 문법, 교육의 전환을 차례로 짚으며 ‘강원이 가야 할 길’을 설계도처럼 펼쳐 보였다. 바람결이 창틀을 두드리던 회의실, 탁자 위에 놓인 따뜻하고 향긋한 차 내음이 공기 위에 천천히 올라앉을 때, 누군가는 응시했고,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 사이사이 숨 고르는 정적이 길의 모양을 닮아 길게 이어졌다.

창간 80주년 특별 좌담회-정념 월정사 주지, 김풍기 강원대교수, 이순원 소설가, 권혁순 강원일보 논설주간이 오대산 자연명상마을 정념(사띠)의 숲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평창=김남덕기자

■길의 정의 : 문명과 진리를 잇는 ‘도’의 언어=“길은 문명을 잉태한 근간입니다. 동양에선 그걸 ‘도(道)’라고 부릅니다. 끊어졌던 것들을 이음으로 바꾸는 원리지요.” 퇴우 정념 스님은 길을 ‘나와 세계, 주관과 객관을 연결하는 정신의 길’로 규정했다. 그의 말에선 길이 단순한 교통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 방식의 질서라는 인식이 뼈대를 이룬다. 그는 ‘도’가 단절과 분리를 잇고, 존경과 기려(企慮·멀리 내다보고 깊이 생각함)의 윤리를 세우며, 결국 평화와 행복의 실천으로 귀결된다고 덧붙였다.

이순원 소설가는 작가의 언어로 이를 받았다. “저에겐 사람과 사람의 마음이 닿는 선이 곧 길입니다. 장소를 옮기는 게 아니라 서로의 내면을 건너가는 일이죠.” ‘길’은 그에게 인물의 서사와 서사의 서로 다름을 연결하는 리듬이다. 말끝에서 짧은 숨이 비쳤다. 한 줄의 문장이 한 사람에게 닿을 때, 그 사이사이에 작은 다리가 놓이는 느낌이라는 고백이었다. 김풍기 교수는 한 문장을 보태며 ‘길은 방향을 주되, 정답을 강요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시가 아니라 초대. 그 표현이 이날 대담의 공기를 부드럽게 바꿔놓았다.

■효율의 명암 : 속도가 만든 직선의 폭력=김풍기 교수는 길의 출발점을 ‘효율’로 짚었다. “여기서 저기까지 가장 빠른 선을 찾는 게 길의 본성입니다. 그 덕에 질서가 생겼지요. 하지만 근대 이후 효율이 인간을 삼키기 시작했습니다.” 효율은 오랫동안 혼돈을 정리하는 기술이었다. 그러나 속도와 순위의 논리가 일상을 점령하면서 깨달음의 길, 문학의 길, 관계의 길 같은 느리고 구불구불한 길들은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났다. “수많은 길들이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무너질 때, 길은 타자를 밀어내는 직선이 됩니다. 그 순간 길은 폭력이 되죠.” 그는 ‘21세기를 지나갈 새로운 길’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속도보다 방향, 단일한 최단거리보다 다층적인 연결을 우선하는 길.

퇴우 정념 스님이 화답했다. “길은 결국 연결의 학문입니다. 연결이 깨질 때 폭력은 증식합니다. 도는 그 끊어진 것들을 다시 잇는 방식이지요.” 효율을 도덕화하지 않고, 도덕을 효율로 환원하지 않는 균형. 대담의 초점이 서서히 강원으로 이동했다. 한 참석자는 ‘빠름’이 가져온 편리의 이면을 떠올렸다. 세상을 일렬로 세우는 순간, 옆사람의 속도는 방해가 되고 타자의 결은 오류가 된다. 느림이 불량품이 되는 사회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서로를 불량으로 판정해 왔을까.

■강원의 정체성 : ‘텅 빈 충만’이 만드는 수용의 지형=강원도는 넓은 면적과 적은 인구, 희박한 산업 집적도를 지닌 땅이다. 효율의 잣대로는 늘 불리한 조건. 그러나 김풍기 교수는 이를 약점이 아닌 장점으로 뒤집었다. “강원은 ‘텅 빈 충만’입니다. 비어 있어 수용력이 큰 상태, 어떤 존재도 맞아들일 수 있는 충만이지요.” ‘없음’이 ‘결핍’이 아닌 ‘여백’이 될 때, 강원은 사람과 자연, 느림과 치유를 담아낼 큰 그릇이 된다는 뜻이다.

이순원 소설가도 말을 이었다. “(강원도에)공장이 드물었던 게 오히려 다행이었습니다. 강원도의 힘은 공장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자연과 사람을 향한 친화성에서 나옵니다. 없음이 힘이 된 셈이죠.” ‘공장 없는 힘’이라는 문장이 탁자 위를 ‘쿵’ 하고 울렸다. 도시의 등줄기를 훑는 회색의 직선 대신, 골짜기마다 다른 물길이 만드는 소리, 밤이면 별이 내려앉는 까만 하늘. 결핍의 풍경으로 묘사되곤 했던 것들이, 이날 대담에선 자원 목록으로 뒤집혀 적혔다.

퇴우 정념 스님은 강원의 명산,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을 ‘영성을 돋우고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큰 그릇’이라고 풀이했다. 길이 방향이라면 산은 그 방향을 담아내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금강·설악·오대라는 이름은 효율의 직선이 아닌 관계의 곡선을 가리키는 이정표라는 뜻이다. “기후 위기, 양극화, 평화의 문제가 뒤엉킨 시대에 강원의 생태적·순환적 생활문화가 도시 문명의 병을 돌보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강원의 미래는 그의 말대로 ‘큰 어머니의 품 같은 오래된 미래’로 형상화됐다. ‘낡아서 새롭고, 느려서 먼저 닿는 미래’라는 화두를 던지는 순간이었다.

창간 80주년 특별 좌담회-정념 월정사 주지, 김풍기 강원대교수, 이순원 소설가, 권혁순 강원일보 논설주간이 오대산 자연명상마을 정념(사띠)의 숲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평창=김남덕기자

■공존의 문법 : 함께 걷는 법을 잃어버린 세대에게=대담은 ‘함께 가는 길’의 어려움으로 기울었다. 퇴우 정념 스님은 디지털 친구와 1인 생활에 익숙한 세대가 느끼는 ‘공동생활 스트레스’에 대해 언급했다. 템플스테이에서도 쉼은 환영하지만 숙식과 대화가 얽힌 공동의 시간은 종종 불편해 한다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관계의 환경을 경험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김풍기 교수는 원인을 ‘이분법적 사고’에서 찾았다. “평준화를 명분으로 순위를 매긴 100년의 교육이 ‘내가 위로 가려면 누군가는 아래여야 한다’는 논리를 내면화했습니다. 세상은 ‘내 편 vs 적’으로 쪼개졌지요.” 서열 중심 사고가 효율만을 추구하게 만들고, 그 효율 지상주의가 결국 공존을 해친하는 도식이 명확해졌다.

이순원의 해법은 간명했다. “다름을 인정하는 연습, 그리고 양보가 손해가 되지 않는 사회. 그 두 가지만 보장돼도 세상은 훨씬 부드러워집니다.” ‘양보가 손해가 되지 않는 사회’라는 명제가 모두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건 제도와 문화의 문제로 동시에 읽혔다. 양보가 패배가 아니라 공유의 시작이 되는 규칙, 타인의 속도를 기다리는 정치와 행정, 서로의 침묵을 존중하는 생활 윤리. 회의실 바깥으로 시선을 옮기면, 좁은 골목길에서 먼저 비켜서는 사람, 도서관 열람실에서 조용히 자리를 양보하는 손짓, 마을회관 긴 의자에 나란히 앉아 말없이 시간을 나누는 풍경들이 그 첫 연습장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계의 철학 : 분별을 넘어 연결로=퇴우 정념 스님은 공존을 가능케 하는 철학적 기초를 ‘관계성’에서 찾았다. “만물은 관계로 일어나고 관계로 사라집니다. 분별이 커질수록 이기성은 증식하고, 관계의 감각이 회복될수록 연민과 평등이 자라납니다.” 그는 이를 불교의 ‘보살행’으로 설명했다. 사랑과 연민, 평등의 마음이 ‘분별의 끝’에서 열릴 때, 타자의 고통은 나의 일이 된다는 것이다.

김풍기 교수는 현대사회의 언어로 이를 변환했다. “관계는 지연과 불편을 포함합니다. 효율은 지연을 적으로 간주하지만, 사람은 지연에서 성장합니다.” 지연은 단순한 늦음이 아니라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사유의 시간이며, 불편은 나와 다른 타자의 존재를 비로소 감각하게 해주는 신호라는 것이다. 이순원 소설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말했다. “소설은 그 지연과 불편의 예술입니다.” 말을 마치고 난 뒤, 모두가 잠깐 고개를 숙였다. 누군가 차를 한 모금 마셨고, 창밖에서는 바람 소리가 창을 흔들었다.

■교육의 전환 : ‘길 밖으로’ 나아갈 용기=대화는 교육으로 옮겨붙었다. 세 사람은 기존의 사고방식과 교육 시스템으로는 AI 시대와 기후 위기의 복합 위기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입을 모았다.

김풍기 교수는 먼저 인간중심주의의 한계를 비판한다. “반려동물을 가족이라 하면서도 문 앞에서 막습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인간중심주의’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AI 혁명은 이미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흐리고 있죠. 이 사유로는 21세기를 살 수 없습니다.” 그가 바라는 교육은 ‘길 밖으로 한 발’을 가능케 하는 용기를 심는 일이었다. “학생이 낯선 방향으로 발을 내딛게 하는 힘, 그게 교육이어야 합니다.”

정념 스님은 현장의 감각을 보탰다. “서열 평가를 벗어나 인문을 강화하고, 질문하는 사람, 다양성을 이해하는 전인적 인격을 기르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지금 제도로는 AI 시대의 인간형을 만들기 어렵습니다.” 그는 실제 학교 현장에서 검정고시로의 이탈이 늘고, 학습의 동기가 ‘순위’에 묶인 채 소진되는 사례를 지적했다.

이순원 소설가는 학습의 감수성을 말했다. “배움은 얇고 긴 선이 아니라 깊고 느린 결입니다. 문장을 써보면 알죠. 빨리 쓰기보다 ‘왜’ 쓰는지가 먼저여야 합니다.” 세 사람의 의견은 ‘정답의 속도’에서 ‘질문의 깊이’로 축이 옮겨가야 한다는 결론으로 수렴됐다. 학교의 종이 울릴 때마다 달려 나가던 운동장의 기억처럼, 배움 역시 바람이 스며들 틈을 가져야 한다는 데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강원의 미래 : ‘생명존중의 길’과 지역의 새로운 역할=이순원 소설가는 향후의 핵심을 ‘공존의 상상력’에서 찾았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문제, 인간과 지구 사이의 문제를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에겐 선한 마음을 더 자라게 할 여지가 있습니다.”

김풍기 교수는 강원의 역할을 구체화했다. “강원은 광활한 자연 속에서 수많은 생명들이 자기만의 길을 걷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풍경은 인간이 자기 길을 발견할 가능성을 공감하게 만듭니다. 결국 강원이 가야 할 길은 ‘생명존중의 길’입니다.” ‘텅 빈 충만’의 여백은 AI 시대의 새 문화를 포용하고,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치유의 무대로 작동할 수 있다.

퇴우 정념 스님은 마지막으로 관계를 다짐처럼 말했다. “길은 혼자 가면 빨리 가지만, 함께 가면 멀리 가고 끝내 도착하게 됩니다. 강원은 함께 도착하기 위해 비어 있는 곳입니다.” ‘함께 도착한다’는 말에 짧은 정적이 흘렀다. 회의실 창밖, 산등성이의 그림자가 저녁으로 기울었다. 끝내 도착한다는 확신은,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다는 위로와 맞닿아 있었다.

■에필로그 : 숲의 오솔길을 위해=세 사람은 대담의 끝에서 같은 말을 다른 어휘로 되풀이했다. 길은 누군가를 밀어내며 빠르게 도착하는 직선이 아니라, 타자의 호흡을 기다리는 굽이진 선이다. 강원도는 비어 있기에 포용할 수 있고, 느리기에 치유할 수 있다. 우리가 지금 선택해야 할 것은 지도상의 최단거리가 아니라 공존의 가장 낮은 문턱이다. 그 문턱을 넘는 순간, 우리는 묻는 사람에서 걷는 사람이 된다. 효율을 넘어 연결로, 경쟁을 넘어 공존으로, 사막의 직선을 넘어 숲의 오솔길로. 강원에서 시작한 이 대화가 각자의 마을과 학교, 사무실과 가정의 식탁으로 이어질 때, ‘오래된 미래’는 현재형이 된다. 그리고 언젠가, 이 느린 길 위에서 우리는 서로의 속도를 기억하는 법을 다시 배우게 될 것이다.

강원의 미래는 ‘생명존중의 길’ 위에서 열릴 것이다. ‘텅 빈 충만’의 여백을 자원으로 전환해 사람과 자연, 사람과 사람, 사람과 기계의 관계를 새로 잇고, 교육은 ‘길 밖으로’ 나아갈 용기를 훈련하며, 정책은 양보가 손해가 되지 않도록 제도화해야 한다. 길의 정의가 바뀌면 사는 방식이 바뀌고, 사는 방식이 바뀌면 강원의 지도도 다르게 그려진다. 이제 필요한 것은 빠른 발이 아니라 끝까지 함께 가는 호흡이다. 오래된 미래를 오늘의 문장으로 불러오는 일, 강원은 그 시작점이 될 수 있다. 정리=오석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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