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삶의 저녁, 따뜻한 밥 한 그릇의 시학”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 이창건 시집 ‘하얀 쌀을 씻어 저녁을 안칩니다’
- “연민과 감사로 빚은 일상 서정을 시로 그리다”

철원출신 이창건 시인의 신작 시집 ‘하얀 쌀을 씻어 저녁을 안칩니다’는 인생의 저녁 무렵, 따뜻한 밥 한 끼를 준비하듯 삶을 돌아보는 시인의 마음이 오롯이 담긴 작품이다. 철원에서 태어나 한국아동문학으로 등단한 그는, 긴 시간 동안 삶의 언저리를 성찰하며 동시와 시를 넘나드는 언어 감각으로 독자에게 다가서 왔다. 이번 시집은 그의 문학 여정이 집약된 사려 깊은 기록이며, 동시에 일상의 정서와 인간에 대한 연민이 교차하는 서정적 아카이브다.

시집 속 시편들은 대체로 소박하고 절제된 언어를 통해 일상의 균열을 비춘다. “슬픈 일도 없는데 눈물이 났습니다“로 시작되는 ‘혈동리의 봄 1’은 무심한 자연의 경이에 눈시울을 붉히는 인간의 섬세한 감정을 포착하고 있다. ‘저녁노을’에서는 “이 세상 머무는 짧은 그 시간에 서쪽 하늘에 붉은 옷도 지어 입혀야 합니다”라는 구절을 통해 유한한 생에 대한 성찰과 미감을 함께 엮는다. 시인은 고요하고 단단한 어조로, 삶의 고통조차도 빛으로 물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문체는 간결하되 결코 가볍지 않다. 이창건의 시어는 설명하지 않고도 감정을 환기시키는 힘이 있다. 은유와 상징보다는 서사와 진술에 가까운 방식으로 독자의 체험을 부른다. ‘어머니, 미안합니다’에서 나오는 신발이야기는가난을 체화한 기억의 조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시인의 언어는 비유보다 체험을 중시하고 있어 큰 울림을 준다.

특히 인상 깊은 것은 시인이 바라보는 세계의 태도다. 그는 분노보다 연민을, 고발보다 응시를 택한다. ‘업’에서 외할머니 등에 업혀 생을 얻고, 다시 그 등을 짊어지며 작별하는 순환적 삶의 이미지는 그의 시선이 얼마나 낮고도 따뜻한지를 보여준다. 슬픔과 고통의 무게를 외면하지 않되, 그것에 짓눌리기보다 곁에 머물기를 택한 시인의 태도는 일상의 성스러움을 회복시키는 윤리적 정서로 읽힌다.

이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하얀 쌀을 씻어 저녁을 안칩니다’는 이 모든 시의 정신을 집약하는 시편이다. “병원에서 오는 아픈 아내에게 따뜻한 밥을 지어줘야 하기 때문입니다”라는 마지막 행은, 사랑이란 그 무엇보다 구체적인 행위이며, 돌봄의 지속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이처럼 이창건의 시는 거창한 서사를 지양하고, 사소한 진실들을 통해 존재의 윤곽을 드러낸다.

이 시집은 노을 빛을 닮았다. 한낮의 격렬함을 지나, 서서히 붉어지는 하늘처럼 조용히 삶을 물들이는 목소리다. 시집은 독자에게 거대한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하얀 쌀을 씻는 마음으로, 사랑했던 날들을 반추하며 오늘의 저녁을 짓는다. 그 밥 냄새는 다정하고, 시처럼 오래 남는다.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강원의 역사展

이코노미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