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은 명인석사(名人碩士)가 많이 배출되었다. 나라에 공이 많아 현신(賢臣)이 된 사람으로는 최치운(崔致雲) 부자요, 학문과 덕행으로 사람들에게 칭송된 이는 박공달(朴公達), 박수량(朴遂良)이요,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린 이는 심언광(沈彦光)과 최연(崔演) 등이니 모두 사가(史家)의 저술에 기재되어 지금까지도 그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국가의 전고(典故)를 기록할 줄 모르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일을 기록할 패관(稗官)도 없었으므로 벼슬에 있으면서 공적이 빛났던 사람일지라도 사적이 민멸(泯滅) 되어 전해지지 않고 있으니 애석한 일이다. 조카와 증손은 일컬을 줄 알면서 공(公)을 일컫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사람됨이 오직 소박하고 겉을 꾸미지 않았기 때문이다.” 1597년 당시 세자(世子)에게 글을 가르치는 벼슬을 하던 허균이 강릉박씨 승지(承旨) 박시형(朴始亨)의 묘표(墓表)를 쓰면서 안타까워한 말이다.
박시형 후손 박기원씨가 기증한 도내에서 가장 오래된 교지(敎旨) 7점이 강원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허균이 언급한 조카는 박공달이고 증손은 박수량이다. 이들을 강릉 12향현으로 받들고 있으면서 학행은 조선시대 도학의 중추적 역할을 한 김종직도 칭찬했고, 문장은 대학자이자 문신 서거정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인 박시형은 그동안 묻혀 있었다.
허균은 “내가 젊었을 때 승정원일기를 보니 공이 국자박사(國子博士)로 상소하여 유학(儒學)을 숭상할 것을 청하자 성종 임금께서 가상히 여겨 특별히 홍문관에 배치하였다. 내가 사관(史官)이 되어 비록(祕錄)을 상고하다 우연히 공에 관한 기사를 보니 공이 사헌부 지평으로 임금을 배알 했을 때 내수사(內需司)의 비녀(婢女)들이 음악을 익히는 것을 금지하도록 청했는데 임금께서 허락하셨다.”라고 했다.
박시형은 성종 임금을 최측근에서 모시면서 바른말을 아뢴 직신(直臣)으로, 안동부사 시절 청백리로 당시 사람들이 모두 칭송한 그를 고향에서 언급 조차하고 있지 않은 점을 허균이 안타까워한 것이다.
이번 지정된 박시형 생원 급제 백패(白牌) 교지는 1456년 발급된 것으로 이보다 6년, 3년 앞서 발급된 백패 교지는 모두 국가문화유산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학계에 알려진 15세기 백패 교지는 15점에 불과하다. 박시형이 관직 임명시 받은 6점의 고신(告身) 교지 또한 모두 540년이 넘은 것들이다.
1993년 박물관에서 입수한 박시형 부친 박중신(朴中信) 문과급제 홍패(紅牌) 교지는 1438년 발급된 것으로 강원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같은 시기에 발급된 교지는 모두 보물로 지정되었다. 영흥판관(永興判官)을 지낸 박중신은 아들이 5형제다. 시원과 시창은 무과에, 시형과 시행, 시문은 문과에 올랐다. 이는 우리나라 역사상 유례가 없는 아버지와 아들 5형제가 문, 무과에 급제한 부자용호과방(父子龍虎科榜)으로 대한민국 기네스북에 오르고도 남을만한 기록이다. 이는 한 가문의 영광이자 향토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1593년 무렵 남원 윤민신의 아들 5형제가 문과에 오른 기록이 있다. 이들이 묻힌 김포시에는 다섯 형제가 용문(龍門)에 올랐다 해서 오룡골이라는 지명이 생겼으며, 이 오룡골은 김포시 향토 유적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박중신 문과급제 교지는 강원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음에도 그간 일부 얄팍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시달리다 지금까지 국가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지 못했다. 이번 박시형 교지 조사 과정에서 왕지(王旨)로 발급되다 교지(敎旨)로 변경되면서 발급된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밝혀져 학계 관심을 받게 되었다.
앞으로 박중신, 박시형 일가 일괄교지는 학술대회를 거쳐 국가문화유산으로 지정 신청 함은 물론 허균이 가슴 아파했던 향토 인물 선양 사업도 활발히 진행되어야 한다. 500년이 훨씬 넘는 세월 동안 어둠 속 장롱에 있다가 밝은 세상에 나와 학계의 관심을 받으며 보석처럼 빛나게 한 후손에게 아낌없는 박수와 갈채를 보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