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신호등]혐오에 맞서는 방법

김오미 문화교육부 기자

“소녀상을 철거하라” 한 통의 제보를 받고 도내 한 고등학교 앞으로 향했다. 평화의 소녀상 철거를 요구하는 극우 성향 단체의 집회가 한창이었다. 혐오와 거짓으로 점철된 말들을 다시 나르지는 않겠다만, 말도 안 되는 문구들이 적힌 현수막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학생들이 한창 수업을 듣던 시간이었다. 두꺼운 교문이 시위대와 학생들 사이를 막고 있었지만 공기처럼 퍼지는 혐오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날 집회가 열린 학교는 더위가 한창이던 지난 8월 찾았던 곳이다. 매년 자체적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행사를 열고 있는 이곳 학생들은 올해도 어김없이 피해자들을 기렸다. 문득 그날의 얼굴들이 떠올랐다. 노란 물결을 이루던 마음들이 다치지는 않았을지 걱정됐다. 경찰의 소극적 대응과 지자체와 교육당국의 무관심이 만든 결과였다. 시위대 뒤로 열린 교실 창문을 보며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교차했다.

어른들이 주춤하는 동안 학생들이 움직였다. ‘맞불’을 놓겠다고 했다. 같이 집회를 하려는 것일까? 아이들이 다치면 어떡하지? 걱정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하지만 모두 기우였다. 이날 학생들은 교내에서 ‘기억하기 위한 작은 몸짓’이라는 이름의 행사를 열었다. 평화의 소녀상의 의미를 되짚는 자리였다. 학생들은 소녀상에 씌워줄 모자와 목도리를 만들었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상징하는 노란나비를 그리며 역사를 기억하는 힘을 키웠다. 교문 밖 집회에 대한 생각을 메모지에 적어 자유롭게 나누는 기회도 마련됐다.

작지만 분명했던 몸짓은 혐오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바로 세워야 할 역사를 상기시켰다. “그들은 저급하게 가도, 우리는 품위 있게 가자(When they go low, we go high)”던 미셸 오바마의 유명한 연설이 떠올랐다. 그저 명언에 불과했던 말이 비로소 피부에 닿았다. 어른들이 혐오와 조롱을 택할 때, 아이들은 연대와 토론을 택했다. 맞불이 아니었다. 어른들의 완벽한 패배였다.

혐오는 쉽다. 긴 말 대신, 두터운 논리 대신 그저 몇 글자면 된다. 하지만 혐오에 대응하는 데는 수십 수백 배의 힘이 필요하다. 모호하기 그지없는 혐오의 기준을 가려내야 하고, 그것이 누구를 다치게 했는지 증명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똑같은 혐오로 맞서거나 그저 피하고 보는 소극적 혐오를 택하고 싶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정확히 알아야 한다. 혐오에 맞서는 방법을.

쉽고 비겁한 길을 택한 어른들 앞에서 학생들이 보여준 모습은 우리 사회에 새로운 이정표를 남겼다. 혐오와 비방의 말들을 실은 현수막이 사방에 나부끼고, 교문 앞까지 혐오가 찾아온 시대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제시했다. “정의를 위한 걸음이 무너지지 않길 바랍니다.” 노란 메모지에 적힌 어느 학생의 바람이다. 학생들이 터준 길을 이제는 어른들이 닦을 때다. 혐오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이 견고하게.

기사 마감을 마치고 제보자에게 뒤늦은 인사를 남겼다. 덕분에 혐오에 맞서는 방법을 배웠다고. 이 글이 닿길 바라며 다시 한번 인사를 전해본다. 불편하고 어렵겠지만, 우리 함께 혐오와 맞서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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