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일반

[신호등]농촌의 보이지 않는 손

고은 사회체육부 기자

이른 새벽 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들녘을 성큼성큼 가로지른다. 의자도 없이 쪼그려 앉아 흙을 고르다 보면 어느새 해가 중천이다. 굽은 허리를 두드리며 돌아온 집에는 차려야 할 밥상이 기다린다. 이들의 손길은 밭과 집을 넘어 마을까지 뻗어간다. 김장철이면 두 팔 걷어붙이는 이유다.

오랫동안 강원 농업을 지탱해온 이들이 있다. 바로 여성농업인이다. 도내 여성농업인의 수는 7만 명으로 강원도 전체 농가 인구의 절반에 달한다. 그러나 여성농업인의 기여는 농촌사회와 정책에서 충분히 조명받지 못했다. 농업경영체는 남편 명의로 등록되고 농업인 단체가 남성의 얼굴로 대표되는 동안 여성농업인은 뒤편에 머물렀다. 농촌사회의 구성원이지만 농가 경영인으로, 동료로 인정받지 못한 시간이 길었다.

그 이름을 정책의 언어로 처음 불러낸 것이 ‘여성농업인 지원사업’이다. 농사와 가사를 동시에 짊어진 이중부담은 노동경감 지원으로, 해가 갈수록 취약해지는 고령 여성농업인의 건강권은 예방접종 지원으로 구체화됐다. 혼자 삼켜야 했던 농업인 개인의 설움이 ‘공공이 풀어야 할 과제’로 떠오른 셈이다.

특히 강원도에서 전국 최초로 시행된 ‘여성농업인 예방접종 지원사업’은 일상의 변화를 가져왔다. 비용이 부담돼 망설였던 여성농업인들이 보건소 문턱을 넘기 시작한 것이다. 바쁜 농번기에 시간을 내기 힘들다던 오순 씨도, 10만원이 넘는 비용을 자신에게 쓰는 게 아깝다던 순옥 씨도 지난해 이 사업을 통해 파상풍 주사를 맞았다. 농사와 가족을 먼저 챙기느라 미뤄뒀던 자신의 몸을 돌볼 수 있게 됐다.

정책이 뿌리내리려던 찰나, 예산이 삭감되면서 제도 도입 2년 만에 위기를 맞았다. 지난해 1억1,800만원이던 예산은 올해 6,000만원으로 대폭 줄어든 것이다. 사업 대상자 수도 3,000명에서 1,600명대로 절반 가까이 감소했다. 예산 축소 이유로는 ‘낮은 접종률’이 꼽힌다. 파상풍·폐렴은 접종 주기가 길어 한 번 맞으면 재접종까지 공백이 생기기 때문이다. 해마다 사업을 거듭한다고 접종률이 쉽게 오르기 어려운 구조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시행 3년차에 접어든 사업에 대한 처방이 예산 삭감이었어야만 했을까. 지금 필요한 건 접종률이 낮아진 이유를 점검하고 풀어내는 일이다.

답은 현장에 있었다. 청년 여성농업인에게도 혜택이 닿도록 대상 연령을 조정하고, 접종 품목을 넓힌다면 정책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요구가 이어졌다. 올해 예산도, 대상 인원도 줄었지만 한 가지 다행인 건 여성농업인들의 목소리가 일부 반영됐다는 점이다. 올해부터 접종 연령은 만 40~64세로 낮아졌고, 접종 품목은 파상풍·폐렴에 더해 A형간염, 백일해 등으로 확대됐다. 달라진 정책이 현장에서 체감될 수 있을지는 앞으로 지켜볼 일이다.

여성농업인 정책은 지금껏 전면에 등장하지 못했던 농촌 여성을 발굴해냈다. 여성농업인에게 필요한 지원을 듣는 일은 그 자체로 농촌을 지탱해온 여성농업인의 지위와 역할을 바로 세우는 과정이었다. 여성농업인이 강원농업의 미래를 여는 자리에 설 수 있도록 탄탄한 정책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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