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봉은사 조실로 계시던 한암 스님이 오대산으로 들어간 해는 1925년 초가을이다.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춘삼월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다’가 그 이유다. 스님은 산문을 나오지 않고 머무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스님들이 피란을 떠난 상원사에서 1951년 3월에 좌탈입망하셨다. 유학을 공부하다가 벽에 막힌 탄허 스님은 한암과 편지를 주고받다가 1934년 22세에 오대산으로 들어왔다. 도(道)란 무엇인가가 그 이유였다. 이후 총 47권의 ‘신화엄경합론’을 번역, 간행하였고 1983년 월정사 방산굴에서 열반하셨다. 만화 스님은 1938년 상원사에서 탄허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월정사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일제강점기와 해방정국, 그리고 전쟁의 혼란 속에서 오대산을 지켰던 세 분의 존재는 많은 이들의 갈증을 풀어주기에 모자라지 않았다. 선지식에 목마른 사람들이 강원도 산골짜기로 걸음을 옮겼다. 1937년 상원사에서 문을 연 강원도 3본산 승려 연합수련소, 1957년의 오대산 수도원 등 반세기 동안 오대산을 찾는 발길이 멈추지 않았다. 도반, 법제자, 직계제자, 시절 인연, 재가 인연, 재가 제자들이 바로 그들이었는데 오대산 아래에 살았던 나는 늘 다른 것엔 관심이 없고 입산길의 그 세세한 여정이 궁금했던 건달바(乾闥婆) 아닌 건달(乾達)이었다.
직계 제자들의 사연은 이렇다. 1958년 10월, 현해 스님은 월정사에 도인 스님이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는데 날은 이미 어두워진 뒤였다. 절 마당엔 종무소인 함석집과 비구승들이 거처하는 기와집이 한 채씩 있었다. 지금의 방산굴은 대처승 가족들이 살던 동네였다. 당시는 비구승과 대처승이 대치하던 상황이었다. 인보 스님은 1956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딱 한 달 있다가 입산했는데 처음 만난 탄허 스님이 빨간 과자를 주었다. 인보 스님은 이렇게 회상했다. ‘내가 젊어서 주지가 되고 싶은 병에 걸렸고, 허송세월 보내지 않았는가 합니다.’ 혜거 스님은 한문 공부를 하고 싶어서 탄허 스님에게 오게 되었다. 월정사로 갔더니 안 계셔서 다시 서울로 돌아갔다가 청량리에서 석탄 차를 타고 태백을 거쳐 삼척 영은사로 가서 스님을 만났다. 1959이었다. 삼보 스님은 1965년 겨울 학생복 차림으로 월정사에 들어왔다, 절이 어떤 곳인지 알고 싶어서. 그런데 탄허 스님을 봉양하던 행자가 ‘오대산을 흐르는 금강연 물처럼 나도 떠나간다’는 편지를 써놓고 야밤에 도망치는 바람에 학생복 차림으로 얼떨결에 시봉을 시작했다. 그러다 눌러앉았다고.
이제 내가 관심을 가지는 이유를 조금은 눈치채셨을 것이다. 지금 월정사 주지인 정념 스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1979년 말 쌍계사에서 행자로 지내던 중 오대산에 가면 팔만대장경에 통달한 도인 같은 스님이 있다는 말을 듣고 월정사를 찾아갔다가 만화 스님을 만났다. 탄허 스님은 가끔 오시는 터라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정도였다고. 10·27 법난이 일어났던 1980년 스님으로부터 여사미거 마사도래(驪事未去 馬事到來-나귀의 일이 끝나기도 전에 말의 일이 닥친다)란 화두를 받아 정진하던 중 밑동이 빠지는 듯한 경계를 만났다.
한 분의 스님이 더 있다. ‘사실 그 시절 오대산은 어렵고, 춥고 그랬어요. 그건 말로 다 못 해요, 참는 것은 저의 신조입니다. 제가 성질이 급하고 멋대로인 면이 있어요. 지금껏 스님 노릇을 해올 수 있었던 것은 탄허 스님의 가르침 덕분에 가능하였다고 볼 수 있어요. 참으면서 멀리 내다보고 다니라는 스님의 가르침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1971년 서울을 떠나 일주일을 걸어서 월정사에 도착한 원행 스님은 지난 3월 12일 호미 한 자루를 남겨놓고 원적에 드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