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강원포럼] 국제분쟁을 막는 일본의 평화헌법

읽어주는 뉴스

윤길로 북한대학원대학교 초빙교수

◇윤길로 북한대학원대학교 초빙교수

최근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한 장면이 있었다. 2026년 3월 19일, 워싱턴 백악관.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 전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의 정상회담이 열렸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이 봉쇄한 호르무즈 해협에 자위대 군함 파견을 강하게 촉구했다. "일본은 석유의 90% 이상을 그 해협을 통해 들여오니 나서야 할 큰 이유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카이치 총리는 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일본의 법률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고 조용히 밝혔다. 담담하면서도 단호한 거절이었다.

일본국 헌법 제9조는 이렇게 선언한다.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 평화를 성실히 희구하며, 국권의 발동인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 분쟁을 해결할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이를 포기한다." 육해공군 전력의 보유와 국가 교전권을 함께 부인한 이 조문은, 1947년 제2차 세계대전의 잿더미 위에서 탄생했다. 전쟁이 무엇을 남기는지를 온몸으로 경험한 한 나라가 다시는 그 길을 걷지 않겠다고 역사 앞에 새긴 서약이다.

이 장면이 더욱 극적인 것은, 거절의 당사자가 바로 개헌의 선봉장이라는 사실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자민당·유신회 연립 합의문에 '헌법 제9조 개정을 위한 조문 초안 협의회 설치'를 명시하며 개헌을 핵심 국정 과제로 추진해 왔다. 그런 그가, 미국의 군사 압박을 막아낸 방패로 정작 헌법 제9조를 활용했다. 평화헌법을 고쳐 전쟁 가능한 나라로 가겠다던 총리가, 평화헌법 덕분에 전쟁 참여를 거절할 수 있었다. 이 선명한 역설은 어떤 정치적 논리보다 힘 있게 일본 헌법 제9조의 현재적 가치를 증명한다. 회담장에서는 민감한 역사 발언도 있었다.

일본 기자가 '왜 동맹국에 이란 공격을 사전에 알리지 않았느냐'고 묻자, 트럼프 대통령은 '기습 효과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답하다가 느닷없이 일본을 향해 되물었다. '기습에 대해 일본보다 더 잘 아는 나라가 있겠느냐, 왜 진주만 때는 나에게 미리 말하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순간 다카이치 총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수십 년간 미국 대통령들이 외교적 금기로 여겨 자제해 온 단어를, 트럼프는 일본 총리 면전에서 거리낌 없이 꺼내 든 것이다." 이 발언은 의도와는 달리 평화헌법의 역사적 정당성을 되비추는 거울이 되었다.

진주만의 기습이 있었기에 반성이 있었고, 그 반성의 무게 위에 평화헌법이 탄생했으며, 그 헌법이 오늘 일본을 새로운 전장으로 끌려가는 상황을 모면 할 수 있었다.

일본내 개헌론자들은 "일본도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헌법의 제약이 사라지는 순간, 동맹의 이름으로 군사 협력을 요구하는 압력 또한 그만큼 거세진다. 평화헌법은 일본을 약하게 만드는 족쇄가 아니었다. 불필요한 전쟁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는, 가장 조용하고 가장 강력한 외교적 방패였다. 힘이 지배하는 시대일수록, 평화의 원칙을 흔들림 없이 지키는 나라의 품격은 더욱 선명하게 빛난다. 평화헌법은 일본만의 유산이 아니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인류가 피로 써 내려간 교훈이며,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를 위해 지금 이 시대가 함께 지켜야 할 약속이다. 군사력의 크기가 아니라 평화를 향한 의지의 깊이로 국제 사회에서 신뢰받는 나라, 그것이 일본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품위 있는 길이다. 이번 미일 정상회담은 이미 그 답을 보여주었다. 일본이 나아가야 할 길은 평화헌법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치를 세계와 함께 지키고 더 넓게 확산시키는 것이다. 총칼이 아닌 헌법의 언어로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나라, 그 길 위에 일본이 진정으로 국제사회로부터 존경받을 미래가 있다.

라이프

이코노미 플러스

강원일보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