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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홍천문화재단 ‘체어 테이블 체어’ 공연 개최
【홍천】홍천문화재단은 29일 오후 7시30분 홍천문화예술회관에서 ‘체어 테이블 체어’ 공연을 개최한다. 이번 공연은 서커스, 마임, 비눗방울, 드로잉 등 각 분야의 광대연기자들이 모여 음악을 통해 다양한 장르...
2022-11-27 12:25:01
보호받지 못하는 아동·청소년 생각하는 연극 연이어 무대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아동과 청소년의 성장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연극이 연이어 무대에 오른다. 화천 문화공감 이랑이 25~26일 화천문화예술회관에서 선보이는 '푸른 늑대의 후예'와 25일부터 서울 종로구 ...
2022-11-24 00:00:00
지학순 주교·장일순 선생 삶 뮤지컬로 만난다
【원주】1970년대 독재정권에 저항해 민주화 운동을 펼친 지학순 주교와 생명협동운동의 선구자 무위당 장일순 선생을 뮤지컬로 만난다. 어린이 창작 음악극 '생명의 땅 원주-빛이 된 사람들'이 27일 오후 4시 원...
2022-11-24 13:17:36
윤동주 일대기와 시 바탕으로 한 오페라 칸타타
시인 윤동주의 일대기와 그의 시를 바탕으로 한 오페라가 무대에 오른다. 춘천시립합창단아 24~25일 오후 7시30분 춘천문화예술회관에서 특별공연 '오페라칸타타 윤동주'를 선보인다. 오페라 칸타타는 칸타타가 ...
2022-11-23 13:32:12
사람과 그림, 열아홉번째 전시회 오늘
【정선】끊임없이 노력하며 순수 그림을 사랑하는 모임인 미술동호회 ‘사람과 그림’의 열 아홉 번째 그림전이 24일부터 26일까지 3일동안 정선 아리샘터 1층 전시실에서 열린다. ‘사람과 그림’은 정선에 거주하는...
2022-11-23 13:25:53
여백의 정원으로 놀러오라는 초대
박동수 태백미술협회장이 오는 26일부터 태백 철암탄광역사촌 한양다방에서 세 번째 개인전을 연다. ‘여백의 정원'을 주제로 한 이번 전시에서는 15점의 서양화를 볼 수 있다. 지점토와 혼합재료를 사용해 그가 ...
2022-11-23 13:22:19
농민화가 길종갑 ‘사창리 사람들’
고향인 화천 사창리에 터를 잡고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길종갑 작가가 오는 27일까지 춘천 개나리미술관에서 ‘사창리 사람들(SACHAN PEOPLE)’을 타이틀로 한 개인전을 선보인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2022-11-23 13:22:14
전쟁터에 던져진 두 남자 이야기
무대 왼쪽 위편, 2022년 11월18일로 시작했던 날짜가 과거로 거슬러올라갔다. 춘천 소작농 출신 연춘과 거지 순년이 처음 만났던 1938년을 보여준 날짜는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차츰차츰 흘러 1950년 6월26일에...
2022-11-23 00:00:00
강원의 젊은 음악인재들 무대 위로
강원의 젊은 음악 인재들이 무대 위에 함께 선다. 대관령음악제가 오는 28일 오후 7시 강릉아트센터 사임당홀에서 영 아티스트 협주곡 콘서트를 개최한다. 정민 상임지휘자가 이끄는 강릉시립교향악단과 강원인...
2022-11-22 15:39:56
“강일언론인회 회원 소장전 열린다”
강원일보 출신 언론인 모임인 ‘강일언론인회(회장:이인영)’가 23일부터 29일까지 춘천 갤러리 4F 3·4층 공간에서 강원일보 창간 77주년을 기념하는 회원 소장전을 마련한다. 강일언론인회 회원들이 소장하고 있는...
2022-11-22 13:38:39
강원도 2청사 설치 두고 지역·도청 내부 ‘뒤숭숭’
특별자치도법 ‘원안 지켜라’ …강원도, 한달 간 ‘초비상 체제’ 돌입
민주당 전·현직 지방의원들 당내 활약 주목
육동한 시장 “도심지 인도의 눈과 얼음 시가 직접 제거”
마을주민들이 발전소 주변 지원금으로 요양원 건립 사업 추진, 관심
안철수 상승세에 강원도내 지지층도 ‘꿈틀’
200명 출향인들의 빛나는 지역사랑, 올해도 계속된다
당신의 아파트 지하 전기차 충전시설, 안전한가요?
가격 올리면 손님 끊기고 안 올리면 문닫을 판…외식업계 ‘한숨’
원주 빈집 570채 애물단지로 전락
[신호등]100년의 꿈 ‘홍천철도’
1970년 소양정과 주변 풍경
소양정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정자로 알려져 있지만 지역에서의 관심은 멀어지고 있다. 소양정은 춘천의 문화를 대표주자로 손색이 없다. 고려, 조선을 살다간 유숙(柳淑·1324~1368년), 원천석(元天錫·1330~?), 조준(趙浚·1346~1405년), 김시습(金時習·1435~1493년), 정약용(丁若鏞·1762~1836년) 등 다양한 인사들이 이곳을 다녀갔다. 문화계 원로들은 소양정을 재조명해 조선의 선비들이 찾고 싶고 살고 싶은 고을로 손꼽던 일을 상기시키며 우리지역의 정체성을 세우는 랜드마크로 만들자고 주장하고 있다. 강가 주변에 위치했던 소양정은 큰 장마가 생기면 소실을 거듭하다 6.25전쟁 때 소실 됐다. 그 이후 1966년 신철균 춘천시장이 박경원 도지사의 도움을 받아 재건해 현재의 위치에 세워졌다. 최근 소양정을 가리던 나무들이 제거돼 시내에서도 정자를 바라볼 수 있게 돼 반갑기 그지없다. 정자가 세워진 직후 주변 풍경 속으로 들어가 보자.(사진1)오른편으로 소양1교가 보인다. 1937년에 세워진 이 다리는 화천과 김화, 양구로 이어지는 주요한 교통로이며 현재까지 시민들의 사용되고 있다. 다리 끄트머리에 같은 모양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 마을은 지금의 50호 마을이다. 우두동 50호 마을은 춘천시가 처음으로 행정력을 발휘해 만든 집단주거단지다. 6.25 전쟁 직후 피란민들의 거주 목적으로 미국의 원조를 받아 조성된 주택단지다. 2년 전 지난해 도시재생 공모에 선정돼 새로운 모습으로 탈피를 준비 중이다.우두벌과 소양강 주변으로 민가가 드믄 드문 보이다. 우두산과 여우고개 방향으로 고개를 돌며 보면 산 아래에 초가집들이 점점이 박혀 있다. 그 주변 소나무 군락지도 집 앞으로 나란히 길게 줄을 긋고 있다. 올미솔밭이다. 이 소나무 숲은 500년 넘는 전통을 자랑하는 숲으로 조선시대 춘천부사 엄황(1580~1653)이 지은 춘주지에 따르면 이 숲은 병자년(1516년)에 선비 최도근이 주도해 동서남북 10리에 수만 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강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피해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심은 것으로 보인다. 선조들이 심은 나무들이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며 나무 심기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의 모습보다 소나무 숲이 더 길고 울창해 보인다.(사진2)소양정 처마 끝에 동면 모습을 담긴 사진은 동면 장학리, 하일, 후평동 일대를 보여준다. 벌거벗은 산들이 까까머리 중학생들의 머리처럼 산들이 벌거숭이다.전형적인 농촌 풍경이 펼쳐져 있다. 사진 가운데 군부대가 눈에 들어온다. 십자가를 단 건물은 성문교회다. 소설가 조성기의 「리하트 하헤렙」의 소설 배경지다. 소설을 픽션처럼 쓰는 작가는 오늘의 작가상, 이상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밭길을 따라 사진 속의 교회를 찾아가면 소설 주인공을 만날 듯하다. 한 여름을 맞은 소양강은 분주하다. 하천변으로 흰 모래가 언덕을 이루고 있다. 강가 주변엔 천막들이 손님맞이가 한창이다. 맑은 소양강 물에 몸을 담근 사람들이 더위사냥을 나서고 있다. 강위엔 나룻배가 사람들을 가득 태운 채 유유자적 물길을 거슬러 오르고 있다. 청평사와 시내를 왕래하던 매월당 김시습처럼 바쁘게 서둘를 것도 없는 한가한 풍경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강원도청 신축 이전 후보지 선정 과정에서 탈락한 강북지역은 과거부터 역사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강원도청 강북추진위원회는 지역발전을 위해 우두 국제학교 유치 및 영어교육도시 조성, 소양8교 임기 내 착공, 북 춘천역 신설, 공병여단 이전, 2차 공공기관 이전 강북 유치 적극 추진 등을 강원도에 건의하고 있다. 모두 장기적인 계획이 필요한 사안으로 지역이 갖고 있는 문화유산을 후손들에게 물려줄 대안이 없어 아쉽다. 우리지역의 문화유산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경춘선 철로변 아이들…위험한 객기에 사고도
“그 시절 그땐 그렇게 갈데가 없었는지~.”노래가사 처럼 그때 그 시절에는 정말 변변하게 갈데도, 딱히 놀 곳도 없었다.기껏해야 동네에서 가장 넓은 공터에 모여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 나와 익숙한 딱지치기나 구슬치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그리고 오징어, 다방구, 비석치기를 하는 정도가 그나마 즐길 수 있는 놀이의 최대치였다. 물론 부자집 아이들은 다른 ‘경우의 수’일 테니 빼놓고 말이다.놀거리 가짓 수가 우리나라 인구 수 만큼은 될 것 같은 현재의 상황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隔世之感) ’을 느낄 일이지만 구슬이나 딱지를 무슨 가보처럼 여겼고, 온종일 땅바닥을 굴러다녀 옷이 더러워졌어도 그 때가 그리운건 그래도 정(情)이라는게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1980년대, 그 이전에 초등학교를 다닌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을 아련한 기억 속 놀이들은 최소한의 재료와 함께 내 몸을 최대한 놀려야 가능했던 것들이다. 물론 몸빵으로 가능한 놀이도 많았다. 여름이면 빈 소주 댓 병을 어항(魚缸)으로 만들어 물고기를 잡았고, 겨울에는 앞 산에 개장한 눈썰매장에서 비료 포대 썰매를 타기도 했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 쉽게 보이고 또 만날 수 있는 ‘지형지물’ 은 그대로 우리들의 놀이터가 됐다.그 중에서도 ‘철길’은 다양한 놀이를 시도해 볼 수 있는, 새로운 놀이터 가운데 하나였다. 당연히 접근성 면에서 철길이나 기차역 주변에 사는 아이들이 철길 놀이의 고수들이었다.하지만 그 놀이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그 당시 아이들은 잘 알지 못했다. 지금이야 철길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어렵지만 그때는 뭐든 왜 그렇게 허술했는지 느슨한 철조망이나 철쭉, 개나리로 된 장벽만 통과하면 얼마든지 철길 위에 오를 수 있었다.역무원들이 경광봉을 흔들고 호루라기를 불면서 단속을 하곤 했지만 아이들은 또 귀신같이 개구멍으로 빠져 나와 위기를 모면하곤 했다. 지금도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철길 위에 못이나 동전을 올려 납작하게 만드는 것도 놀이 중 하나였다. 철로변 아이들이 놀이의 결과물들을 들고 학교에 와서 자랑이라도 할라치면 그건 또 왜 그게 그렇게 부러웠는지…, 한번씩 만져보고는 “우와~” 탄성을 지르는 것은 기본이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아이들은 기차가 오가는 시간을 거의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만일의 사고를 대비해 자갈 위에 무릎을 꿇고는 철길에 귀를 대고 기차가 어디쯤 오는지를 가늠해 보기도 했다. 나름 과학(?)적으로 말이다. “철컹~ 철컹~” 그렇게 길쭉한 쇠붙이를 타고 들려오는 기차 소리를 듣는 것, 그 것 자체도 놀이였다. 그런데 아이들은 기차가 코 앞을 지나쳐도 몇발자국만 물러설 뿐, 시크하고 심드렁한 표정과 함께 빠른 속도로 지나치는 기차를 쳐다보는 것을 무슨 멋처럼 생각했었다. 위험한 ‘객기’였지만 그땐 그랬다.이러한 아이들의 위험한 놀이는 사고로도 이어졌다. 아이들은 철길 위에 못이나 동전보다 훨씬 큰 돌 또는 나무를 올리는 장난을 치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서 기차가 탈선하는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특히 1970년대 철길에 돌을 얹어 놓는 치석(置石) 행위로 인한 사고가 많았는데 1974년 3건이던 치석사고가 1975년 10월말까지 12건 발생했고 이 가운데 5건의 탈선사고가 일어났다고 한다.당시 기사(조선일보·1975년 11월20일자 7면)에 따르면 이 같은 사고의 거의 대부분이 어린이 장난으로 밝혀졌다고 했는데, 기관사가 주먹만한 돌을 발견할 수 있는 거리가200~250m이고 70년대 특급열차의 속도가 80km, 비상 제동거리가 380~400m 인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탈선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경고하고 있다. 또 1998년에도 경춘선 성북역~화랑대역 방향 3.2km 지점에서 10대 4명이 철길에 돌을 올려 놓아 기차가 탈선하는 사고가 발생(동아일보·1998년 3월16일 22면)했는데, 이들에게는 철도법 위반 혐의로 서울 가정법원에 송치 결정이 내려졌다.이 뿐 아니라 1960~70년대에는 열차에 돌을 던지는 사고도 한 해 100건 이상 일어나기도 해 이를 막기 위해 창문의 커튼을 모두 내리고 운행하는 이른바 ‘방탄여행’도 일상다반사로 일어났다고 한다. 변변한 놀거리 하나없는 아이들에게 기꺼이 놀이터가 되어 준 철길은 때로는 누군가의 추억으로 남기도 하지만, 그 시절 아이들을 위협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안긴 씁쓸한 우리들 삶의 한 단면이기도 했다.
1983년 중국민항기 춘천 불시착
우리나라가 1992년 8월 24일 중국과 국교를 정상화하여 수교한지가 올해로 31년째이다.중국과의 수교에는 춘천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1983년 5월 5일 어린이날인 대낮에 수도 서울에 갑자기 요란한 사이렌이 울리고 “실제상황입니다. 주민들은 비행기 폭격으로부터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세요”라는 방송이 이어졌다.이른바 ‘중국 민항기 불시착 사건’이었다. 승객 96명(납치범 6명 제외), 승무원 9명을 태운 중국민항(中国民用航空总局) 소속 여객기는 선양 동탑공항(瀋陽,東塔空港)을 떠나 상하이 훙치아오국제공항(上海,虹桥国际机场)으로 가던 중이었다.탁장인(卓章仁) 등 6명의 납치범들은 기내를 무력으로 장악하고 기수를 대한민국으로 돌릴 것을 요구했으며 승무원들에게 총격을 가해 기수를 강제로 돌렸다. 중화인민공화국 본토를 출발한 비행기가 대한민국에 착륙하기는 건국 후 처음이었다.비행기는 서울을 피해 춘천의 주한미군 부대인 캠프 페이지(CAMP PAGE) 기지에 불시착했다. 시민들은 캠프페이지 안에 불시착한 비행기를 철책 너머로 해방이후 처음 나타난 중국인들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납치범들은 중화민국(대만) 대사 면담과 중화민국으로의 정치적 망명 허용을 요청했다. 당시 안기부 박세직(3사단장 역임) 해외 담당 제2차장이 대책반장을 맡아 납치범들을 기내에서 직접 면담해 요구 조건을 수용할 의사를 밝혀 납치범들의 무장을 해제 시켰다.실무 담당자 중 한명은 당시 법무부 출입국 박희태 관리국장(후에 국회의장)이었다 당시 중국과는 미수교 상태였기 때문에 이 사건은 외교적, 정치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우리 정부는 이 사건을 최대한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다. 이 사건의 해결을 위해 중국 정부는 북한을 의식하여 간접교섭방법을 통해 항공기와 승무원의 송환을 협상하려 소극적이고 제한적인 접촉을 원했다. 하지만 협상의 주도권을 거머쥔 우리 정부의 고자세에 직접적인 교섭으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고, 사건 발생 3일 만에 중국민항총국장 심도(沈圖) 및 33명의 관리와 승무원이 직접 서울을 방문해 당시 공로명 외무부차관보(후에 외교통산부 장관 역임)를 대표로 하는 우리 측과 협상을 벌였다. 교섭의 핵심은 납치범의 처리와 서명당사국의 명칭이었다. 당연히 중국 측은 납치범들은 범죄인들로 간주하고 인도를 요구 했고, 양국의 국가 명칭도 사용치 않으려 했으나, 결국 9개 항에 걸친 정식 외교 각서에 서명을 하고, 명칭도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정식국호를 사용하는 계기가 되었다.또한 항공기는 안전점검 후, 승무원, 탐승객은 부상자 치료 후에 중국으로 돌려보내기로 했으나 납치범은 우리 뜻대로 대한민국 헌법에 의해 재판할 것과 향후 유사한 사건이 발생될 때 긴밀히 협조한다는 선에서 합의가 이루어졌고, 다음해부터 친인척의 방문 교류를 허용하기로 했다.대한민국 정부는 승객과 승무원들을 당시 최고급인 워커힐 호텔에 투숙시킨 뒤, 여의도와 자연농원(에버랜드) 관광을 시켜주었고, 출국 시에 삼성 컬러 TV를 선물하는 등 한-중 관계개선의 지렛대 역할로 이 사건을 활용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납치범 6명은 1년간의 형식적인 구속 수감 후, 추방형식으로 중화민국으로의 정치적 망명을 허용했다.이미 중국정부는 한-중 수교를 예견하고 친인척 방문을 기회로 중국의 안전부(우리의 국가정보원) 소속은 물론 조선족 공무원들을 부부동반으로 동원하여 한국의 각지에 보내 양국 수교에 시작을 알렸다.
“국토중심 방어선 구축, 밤낮으로 지키려 노력, 후대에 기억되길 바라”
“여기저기서 폭격이 이어졌습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대전을 지키겠다고 전우들이 힘을 합쳤죠. 결국에 후퇴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지난 26일 대전시 동구보훈회관에서 만난 노병은 전투 당시의 참상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7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눈가에 깊어진 주름처럼 기억마저 흐릿해질 법도 하건만 전혀 개의치 않은 모습이었다.노병의 이름은 김용대. 우리 나이로 올해 아흔세 살이 됐다. 김 할아버지는 국방경비대 9연대에 입대해 ‘1901036’이라는 군번을 받았다. 때는 1950년, 미 제24사단과 북한군 사이에 대전전투가 일어난 해였다. 그의 나이 스물둘이었다.대전전투는 한국전쟁 때인 1950년 7월14일부터 21일까지 대전지역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다. 북한군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 격전을 펼쳤지만, 사단장마저 북한군의 포로가 되면서 결국 패퇴하고 만다.당시 그는 신탄진 금강철교에서 펼쳐진 방어 작전에 투입됐다. 김 할아버지는 “낮이고 밤이고 항상 폭음소리가 쿵쿵 들렸다”며 “교대로 정찰하며 적군만 나타나면 반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회상했다.치열한 대치 끝에 후퇴 명령이 떨어졌다. 김 할아버지로선 늘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인민군과 제대로 된 교전을 펼치지 못하고 끝내 대전을 내어줬다는 점에서 일종의 부채 의식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그는 “인민군이 폭격 때문에 밀고 들어올 수 없게 되자 조치원하고 공주 쪽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며 “잘못하면 포위를 당할 수 있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그동안 치러진 전투를 일일이 놓고 평가한다면 선뜻 ‘성공한 전투’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6·25전쟁 개전 초기 북한군의 노도와 같은 공격을 막아줬고, 후속 부대의 전개 시간을 벌어줄 수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김 할아버지는 “대전은 국토의 중심으로, 이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노력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며 “짝궁이었던 전우는 폭격에 당해 오른쪽 다리가 끊어졌다”고 눈물을 글썽거렸다.이어 “결국은 대전을 함락시키게 내줬지만 방어 작전을 했기 때문에 열흘이고 보름이고 지연할 수 있었다”며 “물론 방어를 잘했다고 볼 순 없지만 그래도 대전전투가 회자되지 않아 가끔은 아쉽다”고 씁쓸하게 말했다.그는 대전전투를 비롯, 6·25전쟁이 잊혀 가는 것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김 할아버지는 “가슴이 아픈 것이 후손들이 6·25사변을 알고 국가에 대한 애국심을 가지면 얼마나 좋을까 한다”며 “우리의 과거를 기억해 주길 바란다”고 전했다.대전일보=김동희 기자
난국에도 후퇴는 없었다 학생들은 포탄을 날랐다
춘천대첩 기념 평화공원에는 ‘6·25 참전 학도병 기념탑’이 있다. 탑 뒤편에는 강원도립 춘천농업대(현 강원대), 춘천사범학교(현 춘천교대), 춘천공립중(현 춘천고), 도립 춘천농업대학 부속농업중(현 소양고), 춘천고등여학교(현 춘천여고)에 재학 중 춘천대첩에 참전한 500여명의 이름이 새겨졌다.춘천사범학교 8회 학도병 명단에는 ‘박기병’이 있다. 국내 언론계 대표 원로인 양구 출신 박기병(91) 재외동포저널 회장이다. ‘춘천대첩 기념관을 건립하자’는 칼럼을 꾸준히 쓰며 춘천대첩을 후대에 알리고 있다.1950년 6월25일 전쟁 발발 당시, 박 회장은 춘천사범학교 3학년 졸업반으로 교생 실습을 나갔다. 이날 오후에는 피란민 행렬이 시내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배석 장교(교련 교사)는 “우리 학생들도 이런 난국에는 국방의 의무를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박기병 회장을 비롯한 춘천사범학교 학생들은 학도호국단 단원으로 춘천대첩에 참전했다.탄약고(현 남춘천역 인근)에서 포탄을 들어 포 진지였던 춘천사범학교까지 날랐다. 당시 16포병대대는 춘천사범학교 앞에 105㎜ 포를 배치했다.박 회장은 “포탄을 하나만 들어도 벅찼고 낑낑댔지만, 학생들은 후퇴하지 않고 날랐다”며 “우두동에 있던 동방제사 춘천공장의 여공들도 주먹밥을 만들어 군인과 학생들에게 제공하며 도왔다”고 말했다.그는 6·25전쟁의 3대 대첩 중 하나인 춘천대첩이 변변한 기념관 없이 잊히는 것을 매우 안타까워했다.박기병 회장은 “중국 산둥성의 유공도에 가 보면 갑오전쟁기념관이 있다. 망국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기 위해 교육의 장으로 만든 기념관”이라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강조했다.
군인·경찰·학생·시민 한마음으로 방어 ‘대한민국을 지켜낸 3일’
‘치열하게 대전차포를 쏘는 군인들, 그 뒤에서 손으로 포탄을 들어 올리는 학도병, 지게에 포탄을 실어 나르는 시민....’춘천시 근화동 소양2교 부근 ‘춘천대첩 기념 평화공원’에 있는 한 조형물의 모습이다. 이는 낙동강 전투,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6·25전쟁의 3대 대첩으로 꼽히는 ‘춘천대첩’의 의미를 한눈에 보여준다.춘천지구 전투는 1950년 6월25일부터 6월27일까지 국군 제6사단 제7연대, 제19연대가 북한군 제2군단 소속의 제2사단에 맞서 전개한 방어 전투였다. 국군뿐만 아니라 경찰, 학생, 제사(製絲)공장의 여공을 비롯한 수많은 시민이 북한의 기습 공격에 함께 나선 전투였다. 이로써 병력 열세를 딛고 ‘24시간 내로 춘천을 점령해 수원 방면으로 기동, 국군을 포위한다’는 북한의 목표를 좌절시킨 전투이기도 하다.■전쟁의 징후, 새벽 기습 공격=1950년 6월19일 오후 3시. 춘천 방면을 방어하는 제7연대에 투항한 북한군 1명이 북한의 공격 개시 정보를 털어놓았다. 제7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6월23일 야간 작전 회의를 소집하고 비상경계태세에 돌입하며, 제6사단장 김종오 대령에게 외출·외박 통제를 건의했다. 김 대령은 이를 허가했다.6월25일 새벽 4시. 북한군의 포병 공격 준비사격이 시작됐다. 화천에서 춘천에 이르는 관문인 ‘모진교’ 남쪽에 배치된 국군 9중대가 큰 피해를 입었다. 중대장, 소대장이 전사하며 지휘체계가 무너졌고 북한군은 모진교를 점령했다. 당시 북한의 전투력은 국군보다 병력 면에서 4배, 화력 면에서 10배 우세했다.양구에서 춘천으로 가기 위해 거쳐야 했던 북산면의 ‘내평리’도 위기였다. 제7중대가 철수하고 있을 때 춘천경찰서 내평지서는 국군과 연락이 두절된 상태에서 북한군에 포위됐다. 내평지서장 노종해 경위와 경찰관 12명, 대한청년단원들은 내평지서 주변에 모래주머니를 쌓아 진지를 구축하고 1시간 이상 맞섰다. 치열한 교전 끝에 노종해 경위 등 11명이 전사했다. 경찰들이 격전을 치르는 동안 국군 제2대대는 소양강 남쪽에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경찰청은 내평지서 전투 전사자를 포함, 6·25전쟁 전사자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2000년 강원경찰충혼탑을 세웠다. 해마다 강원경찰청장들은 부임 후 춘천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이곳에 들러 추모하고, 임기를 시작한다.■포탄을 나른 시민들 ... 첫날 방어 성공=남침 공격 첫날 소양강을 건너 춘천을 점령하려던 북한군의 계획은 실패했다. 여기에는 화천에서 춘천으로 내려오는 길목에서 벌인 ‘옥산포 전투’가 있었다. 국군 제7연대의 경계 진지를 돌파한 북한군 제6연대는 SU-76자주포를 앞세워 내려왔다. 정오에 북한군의 주력이 넓은 보리밭에 나타나자 제7연대 제1대대는 사격을 개시했다. 병력 손실을 입고 퇴각한 북한군은 오후 2시께 자주포 10대를 앞세워 다시 옥산포로 공격해 왔다.이를 기다리고 있던 제2소대는 57㎜ 대전차포로 북한의 자주포를 타격했다. 곧바로 특공조가 휘발유병과 수류탄으로 적 자주포 3대를 파괴했고, 자주포에서 뛰어내려 도주하려던 북한 승무원을 생포했다. 북한 제2군단장 김광협은 옥산포에서 패배했다는 보고를 받고 “안색이 흙색이 됐다”고 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국군이 각종 실탄을 확보하는 데에는 춘천 시민들의 힘이 컸다. 제16포병대대는 소양강 북쪽의 대대탄약보급소에 있던 탄약을 소양강 건너편 남쪽으로 옮겨 포탄 5,000발 등을 확보했다.제16포병대대의 탄약 운반을 지원했던 김유환씨는 “춘천농업학교, 춘천사범학교 학생, 시민, 잠사회 여공, 경찰들이 이러쿵저러쿵 반대 없이 한마음으로 옮겼다”고 했다. 제16포병대장 김성 소령은 “시민들의 도움으로 탄약을 대부분 운반할 수 있어 탄약 부족은 걱정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소양강 방어선 전투=첫날 전투에서 패배한 북한군은 제2사단장을 교체하는 강수를 뒀다. 해임된 이청송의 후임으로 부임한 북한 제2사단장 최현은 26일에는 춘천을 점령하려고 했다.국군 제7연대가 전쟁 첫날 춘천을 지켜 원주에 주둔하고 있던 제19연대가 증원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제19연대 2대대는 우두산 일대의 방어 진지를 점령하고 제7연대 1대대를 지원할 태세를 갖췄다.26일 새벽 3시께 북한의 공격이 시작됐다. 북한군은 이날 오전 10시부터 SU-76 자주포를 소양강 북쪽에 두고 봉의산(강원도청 뒷산) 연대 관측소는 물론이고 소양강 제방 진지에 직격탄을 퍼부었다.북한의 총공격에 대전차포 소대원들이 두려운 마음에 진지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이를 목격한 소대장 심일 중위는 진지로 뛰어들어 직접 대전차포 사수가 되어 사격을 개시했다. 대전차포 소대는 북한군의 춘천시내 진입을 막았다.북한군은 소양교 돌파가 실패하자 가래묵나루로 소양강 도하를 시도했지만 국군의 포격을 받았다. 북한군은 엄폐물이 없는 강변의 모래사장에서 일방적으로 포격을 맞으며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제6사단은 이틀에 걸쳐 춘천을 사수했다. 그러나 전체적인 전황은 악화되고 있었다.■작전상 후퇴와 춘천 함락=북한군은 27일 오전 5시부터 소양강변과 봉의산 일대에 포격을 시작했다. 제6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춘천의 행정기관, 시민이 탈출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 지연전을 실시하기로 결심했다.27일 정오 무렵, 국군 제7연대의 방어도 한계에 다다랐다. 북한군은 자주포를 앞세워 이날 오후 1시께 소양로1가에서부터 4가까지 점령하며 사실상 춘천의 중심부를 모두 점령했다. 오후 6시께 춘천의 최종 방어선이 돌파됐고 임부택 중령은 철수를 명령했다. 북한군이 시가지에 진입하자 시민들도 피란을 가기 시작했다. 춘천지구 전투에서 국군 제6사단은 370명이 전사했고, 북한군의 사망자는 6,800명이었다.이렇게 북한군 제2군단의 진격을 저지함으로써 개전 초반 국군이 전열을 재정비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한편 28일부터 북한군 시체를 소양강에서 건져내는 작업이 진행됐다. 꼬박 3일이 걸렸다. 이 작업을 했던 노병 김장현씨는 훗날 춘천지구 전투 연구진과의 인터뷰에서 “그 이후 해마다 6월26일과 8월 추석이 되면 소양강에 가서 술을 한잔 부어 놓고 영혼이라도 편히 잘 살라고 기원했다”고 말했다. 자신과는 개인적으로는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인데 죽였다는 무거운 마음 때문이었다. 당시로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 상황이었으니 어쩔 수도 없었다.전쟁을 기록하고 기억해야 하는 건 이런 비극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기 위함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