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태종이 찾아갔으나 만나주지도 않아 `절의 지킨 은사' 원천석

[역사속의 강원인물, 그들이 꿈꾼 삶]

◇운곡 원천석 선생 존영.

고려의 삼은(정몽주·이색·길재)이나 중국의 백이숙제보다 높은 절개

- 원영환 교수가 말하는 '운곡 선생'

운곡 선생은 1330년 (고려말) 개성에서 출생하여 90여 세까지 생존하셨던 은사(隱士)이며, 강철 같은 정신으로 절의(節義)를 지킨 우리 민족의 전형적인 선비요 학자였다. 선생의 본관은 원주이고, 성은 원(元)씨이며, 이름은 천석(天錫), 자는 자정(子正), 호를 운곡(耘谷)이라고 하였다. 운곡이라는 호는 선생이 직접 지은 것으로 부귀공명을 버리고 산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활한다는 뜻이다.

운곡은 타고난 천품이 총명하고 재능이 뛰어나 일찍이 학문을 성취하였으나 고려말기 사회의 혼란으로 입신양명하여 부귀영화를 누릴 만한 시대가 아니었다. 선비는 천하에 도가 있으면 세상에 나가고, 도가 없으면 은거한다는 유교사상에 따라 운곡은 22세에 고향인 원주로 낙향하여 서곡에서 생활하면서 오로지 학문 연구에 정진하였다.

그러나 입신양명을 간절히 소망하는 부모님의 뜻을 저버릴 수 없어 국자진사가 되었으나 본래부터 부귀공명에 뜻이 없었던 운곡은 대과에 응시하지 않고 횡성군 강림면 부곡리 치악산 동쪽 언덕에 초당을 짓고 누추하고 졸렬한 서재라는 뜻으로 누졸재(拙齋)라 하였다. 운곡은 1,000권의 책을 쌓아놓고 더욱 학문에 정진하여 삼교(유교, 불교, 선교) 일체를 주장한 대학자가 되었다.

선생은 문장과 시문에도 능통하여 은둔해 사시면서도 우주 삼라만상을 주제로 한 시문을 짓고, 불의를 자행하고 역사를 날조하는 권력자들을 사정없이 질타하는 수많은 글을 남기셨다. 그래서 퇴계 이황선생은 원주에는 올바른 역사가 있다고 하셨으나 불행하게도 분실되고, 오늘날은 1,144수의 시문만 남았다. 그러나 후세의 학자들은 시문도 사관(史官)의 기록과 같아 우왕과 창왕이 신씨가 아니고 왕씨라는 사실을 비롯하여 고려의 멸망과 조선건국의 복잡다단하게 얽힌 역사적 사실의 편인을 증명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고려 말기 사회는 내우외환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밖으로는 원나라의 내정간섭, 홍건적과 왜구, 명나라의 침략 등 어려운 문제들이 쌓여있었고, 안으로는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에 이르는 무능한 군주와 권신들의 발호, 친원과 친명 세력 간의 갈등, 탐관오리들의 착취, 불교의 타락 등으로 국가는 비틀거리고 사회는 혼란하였으며, 백성들은 유리걸식하는 혼란한 사회였다.

고려 말의 부패한 사회상은 운곡이 24세 때 양구지방의 실정을 주제로 쓴 시문에서 잘 표현되었다. “무너진 집에는 새들이 지저귀고, 백성들 달아나니 아전도 보이지 않네. 해마다 폐해만 더해가니 어느 날에 즐겁게 사나. 땅은 모두 권세가에게 빼앗겼는데, 포악한 무리들은 문 앞에 늘어섰네. 남아있는 사람들만 더욱 가엾구나. 이와 같은 백성들의 고생이 누구의 잘못인가?”하였다.

또한, 1603년 강원도 관찰사 박동량은'운곡시사(耘谷詩史)' 서문에 운곡 선생을 평하기를 “나는 일찍이 원주사람 원천석 선생이 고려 말에 숨어 살면서 저술한 책에 우왕과 창왕 부자는 신돈의 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세히 말씀하셨고, 조선 왕조가 들어서자 문을 닫고 세상에 나오지 않고 일생을 마쳐 그 맑은 풍모와 높은 절개는 포은(정몽주), 야은(길재) 등과 비등하다고 들었다”하였고,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낸 허목은 운곡선생 묘갈에 “운곡선생은 백대의 스승”이라고 평하였으며, 병조판서를 지낸 정범조는“조선 왕조가 역성혁명을 할 때 왕씨를 위하여 절개와 의리를 지킨 분들 가운데 정포은(정몽주), 길야은(길재), 원운곡(원천석) 세 선생이 더욱 뛰어났다. 그러나 운곡 선생 같은 분은 고려조에서 한낱 진사일 뿐 벼슬을 한 것도 아니고, 국록을 먹지도 않았다. 특히 태조께서 등극하시기 전에 동학의 친구였으니 선생이 시운에 영합하여 좌명훈신이 된다 한들 누가 옳지 않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운곡 선생은 대대로 국록을 먹는 집안의 후손으로 의(義)를 지켜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치악산 바위틈에 숨어서 목석(木石)과 함께 늙으셨으니 그 자취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처신한 절의는 포은이나 야은 두 선생보다 더 어려운 것이다” 하였다.

1977년에 발간한 '국역운곡시사'에 서문을 쓴 김종무(鍾武) 선생은 “고려말 충절로는 삼은(정몽주, 이색, 길재)을 꼽지마는 운곡의 높은 절개는 삼은에 비할 바가 아니다. 포은과 목은은 그만두고, 야은 길재도 누구도 탓하는 사람은 없지만, 고려조에서 문하성의 주서로서 칠품벼슬을 지냈으니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이라고 신왕조에 간구해서 조용히 여생을 마친 것은 당연지사이다. 그러나 운곡은 진사정도였으니 고려왕조가 옥사한 후에 신왕조에 등용하여 부귀영화를 누렸다 해도 나무랄 데가 없다. 그런데도 운곡은 제자가 조선왕조의 3대 왕인 태종으로 등극한 후 스승을 찾아 강림까지 갔으나 치악산 속으로 피신하여 만나지 않았으니 이와 같은 결백과 강직한 지조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하였고, 또한, 중국에서는 결백한 인물로 백이와 숙제를 숭배하지만 백이숙제는 주나라 무왕이 천하를 평정하자 수양산에 숨어서 고사리를 캐어 먹으며 연명하다가 굶어서 죽었다 하니 청백한 것은 틀림없고, 백세의 청풍이라고 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칭송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백이숙제는 고죽군의 왕자로서 당시의 지배계급이었고,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이신벌군(以臣伐君)의 부당성을 극간 하였으나 무시당했으니 수양산에 은거하는 길밖에 처신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백이숙제가 백세의 청풍이라면 운곡은 만고의 청풍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일국의 지존인 태종이 스승의 초당을 찾아갔으나 운곡 선생은 치악산 변암(弁岩)에 은거하여 만나주지 않았다. 태종은 3일간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고 운곡 선생이 계신 산을 향하여 절을 하고 가셨다 하여 후세사람들은 태종이 절을 한 산을 배향산이라 하고, 태종이 원통해하며 눈물을 흘리며 넘었던 산 고개를 원통재라고 하며, 태종이 삼 일간 머물렀던 곳을 주필대, 또는 태종대(太宗臺)라 한다. 특히, 태종대는 강원도문화재자료 제16호로 지정하여 보호 관리하면서 운곡 선생의 절의 정신을 선양하고 있다.

조선 후기의 사가들이나 현대의 학자들은 고려의 충신이나 중국 은나라의 충신의 평가를 단순한 결과만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처해 있던 개인의 배경과 환경을 분석하여 운곡 선생을 고려의 삼은(정몽주, 이색, 길재)이나 중국의 백이숙제보다 높이 평가하였다.

또한, 운곡 선생의 평가는 절의(節義)뿐만 아니라 문학의 평가도 높이 하였다. 강원도 관찰사 박동량은 “은거하여 벼슬 없이 지낸 사람으로 운곡 선생과 같은 분이 있어 시를 읊어 사실에 근거한 기록을 바르게 하였다. 말씀 한마디, 글자 한 자가 모두 충분(忠憤)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어 우왕과 창왕이 왕씨의 부자로 정해졌을 뿐만 아니라 고려사 가운데 어지러운 말과 망령된 글들도 이로 말미암아 변증할 여지가 있게 되었으니 은자로 궁색하게 초야에 묻혀 살거나 세상에 나가 벼슬을 선택한 사람들의 길은 달랐지만, 나라의 빛이 된 것은 마찬가지이다”라고 운곡 선생의 학문을 평가하였다.

운곡 선생의 회고가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 오백 년 왕업을 목저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내는 객이 눈물겨워 하노라”는 이미 교과서에 올라 있으니 운곡의 문학의 수준은 재론의 여지가 없거니와 또한 현대 국문학자 중에는 운곡 학술회를 통하여 운곡 선생이 남긴 시문 1,144수만으로도 세계에 자랑할 만한 문학임으로 운곡 선생을 절의의 은사로만 평가할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문학자로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까지 90여 년간 생존했던 유학자로서 어지러운 사회를 피해 청고(淸高)한 은거 생활을 하면서 강철 같은 정신으로 절의를 지키며 올바른 고려 망국의 기록과 조선 건국의 기록을 남긴 운곡선생을 오늘의 사가들은 고려 말의 삼은(포은, 목은, 야은)이나 중국의 백이숙제보다 높이 평가하고 있다. 오늘의 사가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삶을 기록할 것이고, 후세의 사가들은 오늘 우리의 삶을 평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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