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로 가는 길은 뜨거웠다. 화물연대 파업이 시작되었고 폭염주의보가 내린 날이었다. 치악산 깊은 곳에서 숨어 살다 가신 운곡(耘谷) 원천석 선생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선생의 숨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은사(隱士)의 길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개국하는 그 소용돌이 속에서 선생이 선택한, 평생을 골짜기에서 김을 매는 삶(耘谷)이 혹 후회스럽지는 않았는지 묻고 싶었다. 절개와 의리를 지킬 것인가, 아니면 새 흐름을 따를 것인가에 대한 갈등은 크기의 차이는 있겠지만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도 적용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원주에 도착해 차에서 내려 바라본 치악산 정상은 멀고 아득했다.
원주 톨게이트 근처 아모르웨딩홀 주차장에서 만난 강원일보 사진기자 오윤석은 먼저 점심을 먹자고 청했다. 행구동 운곡 선생 묘역 근처에 괜찮은 묵밥 집이 있다고 했다. 나는 묵밥을 국밥으로 들었다. 이렇게 뜨거운 날 국밥을 먹자고 청하다니. 국밥보다는 차라리 막국수가 낫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그제야 국밥이 아니고 시원한 묵밥이란다. 메밀이나 도토리로 만든 묵밥이라… 왠지 운곡 선생의 은거와 묘하게 연결돼 있는 음식인 것 같아 흔쾌히 동의한 뒤 우리는 치악산 자락으로 이어진 구불구불한 길로 차를 몰았다.
강원도기념물 75호인 운곡 묘역으로 가는 언덕길은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묘역 입구의 창의사(彰義祠)는 오직 운곡 선생만을 모시는 사당으로 2006년 원주시에서 지어 선생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었는데 담을 따라 심어놓은 붓꽃은 이미 꽃이 진 뒤였다. 후손들이 붓을 들고 살게 해달라는 의지를 모아 종중에서 심었다고 했다. 사당 오른편 솔숲이 우거진 산자락에 자리한 초록의 묘역은 아름다우며 수수했다. 드문드문 박혀 있는 바위도 이채로웠다. 그런데 초보자가 봐도 특이한 형태의 묏자리였다. 조선의 건국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무학대사가 점지해준 자리라니 그 인연 또한 묘하기 이를 데 없었다. 봉요혈(蜂腰穴), 즉 벌의 허리 부위에 묘를 썼다는 것이다. 지금의 자리에 묘를 쓰면 후손이 번창할 것이고 그 위에 묘를 쓰면 본인이 부귀를 누릴 거라고 무학대사가 말했다는데(아마도 가묘를 정하며) 선생의 선택은 후손이었다. 내 묘에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선생의 유언은 그대로 지켜지다가 4대가 지난 다음에야 후손에 의해 자그마한 묘비가 세워졌다. 묘소 오른편 아래에는 삼척 육향산의 동해척주비(東海陟州碑)로 유명한 미수 허목의 묘갈(墓碣)이 있는데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한 전서체(篆書體)를 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묘역 탐방의 마지막 순서로 나는 오윤석 기자에게 바위 아래의 말벌 집을 보여주었다. 바위에 매달린 벌집 입구에서 붕붕거리는 무서운 벌들은 그 오랜 세월 동안 운곡 선생의 뜻을 지키려는 능참봉들 같았다.
운곡 선생이 벼슬을 포기하고 치악산에 숨은 이유는 분분하다. 여말의 어지러운 정국이 그 첫 번째 이유라면 두 번째 이유는 은거 중 고려가 망하고 역성혁명으로 조선이 개국하는 상황일 것이다. 시대의 격변기에 선생은 치악산 자락을 옮겨 다니며 그의 호(號)대로 '산골짜기에서 김을 매며' 지냈는데 그것으로 일생을 마무리한 건 아니다. 바로 조선의 3대 왕인 태종과의 인연이다. 그 인연이 서려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횡성 새말에서 문재를 넘어 진빵으로 유명한 안흥으로 향했다. 안흥은 치악산의 동쪽 끝자락에 자리한 마을이다. 거기서 주천강을 따라 내려가면 강림이란 곳이다. 치악산의 동남쪽이다. 그곳에 지금은 사라진 각림사(覺林寺) 절터가 있다. 바로 태종이 어린 시절 운곡 선생에게 학문을 배운 곳이다. 태종은 모두 네 번에 걸쳐 각림사를 찾았다고 한다.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준 뒤의 네 번째 방문에서도 스승을 찾았는데 운곡은 치악산 깊은 곳 변암(弁岩)으로 숨어버렸다. 사실 나는 탐방의 마지막 코스를 찾아가는 자와 숨는 자의 길을 따라가기로 일찌감치 정해 놓았다. 그것도 모른 채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따라오는 갓난아기 아빠 오윤석 기자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각림사는 당연히 없었다. 그 자리에 있는 강림우체국 안으로 들어갔더니 직원이 어서 오라고 반겼다. 태종도 운곡 선생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소포를 부치고 우체국을 나서는 할머니 한 분을 따라갔다. 허리가 아픈 할머니는 유모차를 밀고 태종로라 이름 붙인 길을 건너려고 했다.
“할머니, 옛날에 여기 절이 있었다고 하던데 아세요?”
“야아, 알아요.”
우체국이 세워지기 전엔 밭이었다고 한다. 들은 얘기 좀 해달라고 청했다.
“절이 어찌 될 때 부처를 어딘가로 옮겼다고 하던데 잘 기억이 안 나…”
태종은 운곡을 만나려고 각림사에서 치악산 자락으로 향했다. 첫 번째 전설이 남아 있는 곳은 노구소(노고소·姑沼)다. 빨래 하는 할머니에게 운곡이 어디로 갔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엉뚱한 곳을 일러주었다가 나중에 임금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자책감으로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한다. 왠지 마음이 씁쓸했다. 물 건너편 언덕 위에는 할머니의 넋을 달래주려는 사당이 몇 년 전에 지어졌다지만, 어쩌면 전설에 불과한 얘기일지도 모르지만 씁쓸한 마음을 달래기에는 부족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인근 논에서 벼에 비료를 주는 중년의 남자, 나무그늘 아래 놓인 평상에 앉아 있는 아주머니들, 길 옆의 꽃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아저씨. 나도 그들에게 운곡이 숨은 곳을 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현재의 노구소는 튜브를 가지고 헤엄을 치는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노구소에서 조금 더 올라가니 산자락이 개울을 만나 벼랑이 된, 풍광이 훤한 태종대(太宗臺)였다. 왕이 쉬어갔다는 곳이었다. 절벽 아래 너럭바위와 그 위를 미끄러져 흐르는 물속까지 환했다. 이마와 겨드랑이로 흐르는 땀을 닦는 것도 잠깐 우리는 다시 길을 떠났다. 운곡의 숨은 길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태종로 부곡 2길, 원래 지명에 의하면 가래골. 그 입구의 돌탑공원부터가 시작이었다. 계곡 왼편에 위치한 길은 좁았다. 길옆의 나무들이 무성한 가지를 길 쪽으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계곡 어디쯤에 운곡 선생의 마지막 은거지인 누졸재(拙齋)가 있을 터였다. 천여권의 책을 쌓아놓고 학문에 정진했다는 누졸재. 누추한 곳에 옹졸한 사람이 사는 집이라는 뜻의 누졸재. 그리고 태종을 피해 더 깊이 들어가 숨은 곳인 변암(弁岩)까지. 오윤석 기자의 차는 기세 좋게 시멘트로 포장한 산길을 십여분 달렸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개울에 놓인 작은 다리를 건너자 길은 비포장이었고 심지어 쇠줄이 가로막고 있었다. 우리는 차에서 내렸다. 나는 작은 수첩을 들고 오 기자는 무거운 카메라를 든 채.
“걸읍시다.”
“……예.”
오 기자의 얼굴표정이 그다지 밝지 않았다. 빨리 끝내고 화물연대 파업현장에 가야하기 때문이다. 나는 모르는 척 먼저 산길로 들어섰다.
흰 나비 청색 나비 밤색 나비 들이 길 위에서 날아다녔다. 산뽕나무의 오디가 산길 위에 촘촘하게 떨어진 유월의 오후였다. 흰 나비가 조금 앞서서 길을 안내했다. 그런 것 같이 느껴져서 기분이 좋았다. 오 기자의 얼굴은 땀방울이 촘촘했다(체력하곤!). 계곡의 물소리가 시원하게 들렸다. 나는 개울물로 세수를 했다. 표지판도 이정표도 없는 산길이었다. 계곡은 깊고 아늑했다. 과연 운곡 선생이 왕을 피해 숨을 만한 곳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길은 끊어지고 나비도 사라졌다. 곳곳에 멧돼지가 다녀간 흔적이 보였다. 휴대폰도 불통이었다. 새들과 풀벌레 소리만 가득한 산속에서 우리는 오도 가도 못하고 서 있었다. 변암은 고사하고 누졸재도 찾을 수 없었다.
“대체 운곡 선생은 어디에 숨었을까요.”
휘청거리며 골짜기를 내려오는데 사라졌던 흰 나비 한 마리가 서운한 마음을 달래주듯 다시 나풀나풀 날고 있었다(산을 내려와 인터넷을 뒤지니 변암은 치악산 비로봉 정상에서 삼백여 미터 아래에 자리하고 있단다). 세상은 여전히 뜨거웠다. 나는 대관령으로 향하고 오 기자는 화물연대 파업현장으로 떠났다. 당신은?
사진=오윤석기자 papersuk1@kw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