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청도 서산 땅에서 유복한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장성한 후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는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고난의 길로 들어선 것을 의미했다. 김강이 시몬의 이야기다. 그는 신유박해로 부인이 체포돼 1년간 옥살이를 하고 본인은 피신해 있어야만 했다. 등짐장사를 하면서 여기저기 다니며 복음을 전하다가 옛 하인의 밀고로 체포돼 안동에 수감됐고, 임금의 사형 집행 윤허가 내려오기 전 옥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강원감영의 첫 번째 순교자.
200여년이 지나 김강이 시몬은 오는 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집전하는 시복미사에서 성인 이전 '복자'로 추대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로 등 124위가 대상이며, 도내 순교자는 3위가 포함됐다.
95위 최해성 요한은 가족과 함께 원주 서지(현 부론면 손곡리)로 이주해 작은 교우촌을 이뤘다가 1839년의 기해박해가 일어나면서 체포된 후 배교를 권유받지만 “원주 고을을 다 주신다 해도 거짓말을 할 수 없고, 우리 천주를 배신할 수 없다”고 답한 뒤 1839년 28세의 나이에 참수됐다.
99위 최 비르지타는 1801년 신유박해 전 남편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중 유배지에서 남편을 잃었다. 이후 천주교 서적을 지닌 이유로 옥에 갇힌 조카 최해성 요한을 만나러 가던 중 체포됐고, 모진 고문에도 살아남자 조카가 순교한 그 해 옥리들에 의해 교수됐다.
이 밖에도 124위 순교자 중 도와 인연을 맺은 인물들은 누가 있을까.
1839년 대구에서 참수를 당한 김사건 안드레아는 김강이 시몬이 큰 아버지다. 숱한 고문에도 동료들을 지키다 1819년 참수형에 처해졌다.
신태보 베드로는 신유박해 후 강원도로 이주해 신앙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 교회 재건운동을 벌이던 그는 1839년 기해박해로 전라 전주성에서 순교한다. 이성례 마리아는 한양에서 살다가 박해의 위험을 느끼고 강원도로 거처를 옮긴다. 이후 기해박해로 체포돼 한양으로 압송돼 모진 고문 끝에 1840년 서울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허남윤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