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강군은 과거 강원도 서북쪽역에 위치한 곳이다. 북쪽으로는 함경도 안변군과 연접했고 동쪽으로는 회양군, 서쪽으로는 이천군, 남쪽으로는 철원 및 김화와 붙어 있다. 1945년 광복 당시 평강군은 평강읍과 남면 목전면 서면 세포면 유진읍 현내면 등 2개 읍 5개 면 49개 리의 비교적 작은 지역이었다. 대표적인 곳은 해발 752m의 추가령이 있다. 일명 죽가령으로도 불리는데 우리나라의 지질과 지형을 구분한다. 특히 백두대간이 추가령에서 한북정맥이라는 이름으로 남서쪽으로 이어진다. 한북정맥은 서울의 북한산을 거쳐 임진강과 한강의 합류지점인 장명산에서 맥을 접는다.
일제시대 때도 인구 6만명 육박
그 시절 강원도 4대 도시 중 하나
북한강 줄기 따라 평강평야 유명
벼농사 많이 지어 넉넉했던 고장
수십년 세월에 기억은 흐릿해도
내가 태어난 그곳 지금도 그리워
“평강의 벌판은 넓어서 일본군의 실전 훈련장이기도 했고 농부들이 밤에 길을 잃으면 새벽에 닭이 울 때라야 찾는다 해 '닭이 우리 벌'이라고도 불렸다.”
평강을 고향으로 둔 이용만(82) 전 재무장관의 회고다. 기억이 사라질세라 이 전 장관은 고향의 이야기를 기록했고 시판하지는 않았지만 한 권의 노트로 남겼다. 평강읍 복계리 석교동 450번지에서 태어난 이 전 장관이 떠올리는 평강은 평강 평야 북쪽 끝 자락에 100여 가구가 사는 제법 큰 마을이었다.
마을 뒤로는 오리나무 숲이 우거졌고 집에서 500여m 앞에는 북한강 상류가 흘렀다. 흔히 석교리 또는 돌다리라고 부르는 마을을 들어서면 큰 길 옆에 제일 높게 돌담을 빙 둘러싼 이 전 장관 집을 볼 수 있었다.
“농사가 크고 가축이 많아 집안은 늘 농사일로 바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마을에서도 부지런하신 것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큰 부자는 아니더라도 시골의 넉넉한 집 둘째 아들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회고했다.
이 전 장관은 “학교는 신작로를 따라 한 5리(2㎞)가량 떨어져 있었다. 일본군이 훈련용 비행장으로 만든 길을 따라 학교에 갈 수도 있었다. 비행장이 요즘 같은 아스팔트 활주로가 아닌 그저 평평한 풀밭 활주로를 가진 비행장”이라며 등굣길을 말했다. “봄과 여름 비행장 길로 학교를 가면 길은 갖가지 들꽃과 종달새 둥지 등 아이들이 놀 거리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고 했다.
북한의 공산화 속에서도 지주로 몰리지 않았던 집안이 6·25전쟁 등으로 고난을 겪었고 고향마저 떠나야 했던 상황에 대해 이 전 장관은 “그때 지주로 몰려 마을에서 추방당했다면 우리 가족이 모두 월남해서 단란하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고 했다.
같은 평강읍에 살던 이일무(91) 평강군민회 고문은 “평강은 고원지대로 일정 때 일본이 최고의 요양소를 만든다고 할 정도로 살기가 좋은 곳”이라고 고향 자랑을 빼먹지 않았다.
“마을에 저수지가 있었는데 겨울에는 전국 단위 빙상 대회도 열렸다”며 “비교적 농토도 좋고 저수지가 있어 벼농사를 많이 지었다. 군민도 잘 살았다”고 했다. 특히 이 고문은 “일정 때 강원도에 4개 지역에만 읍이 있었다. 춘천과 평창 통천 등이었다”며 “당시 인구가 5만명을 넘어 6만명에 가까웠는데 강원도에서도 괜찮은 도시 중에 하나였다”고 자랑했다.
평강읍과 인접한 남면 가곡리 출신인 김종수(72)씨의 기억 속 고향은 70~80가구가 오손도손 사는 시골의 전형적인 작은 마을이다. 김씨는 “어린 시절 통천 사람들이 원산까지 타고 다니던 기차가 있었는데 우리 마을에 정거장이 있었다. 항상 신기해서 기차가 지나가는 시간을 손에 꼽기도 했다”고 술회했다. 이어 “우리 마을은 눈이 참 많이 내렸다. 그럴 때마다 먹이가 없는 산짐승들이 그렇게 마을까지 내려왔다. 노루는 흔했고 지금은 못 보는 늑대나 여우도 있었다”며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했다.
전쟁 당시 피난 내려왔다가 남한에서 가장 북쪽인 철원군 정연리에 사는 김씨는 “내 고향은 여기서 걸어서도 갈 만한 곳이다. 기차로만 따지면 정거장 하나 거리인데 그렇게 60년이 지났다”고 했다. “고향집과 선산, 토지가 제대로 있는지 궁금하네요. 가 봐도 별것 없겠지만 내가 태어난 곳이라 지금도 여전히 그립습니다.”
미수복 강원도민회는
광복과 전쟁을 거쳐 미수복이 된 통천군과 회양군 평강군 이천군 김화군 등에 더해 철원군과 고성군 등은 미수복 지역으로 남게 됐다.
이들 지역 출신으로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주민들은 각각 군민회를 조직했고 각 군민회가 미수복 도민회로 모이게 된 것은 1987년 5월이었다. 당시 평강군민회장을 맡고 있던 이일무 회장이 초대연합회장에 취임했고 이후 미수복 도민회는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이후 거의 매년 미수복 도민회는 합동망향제와 함께 체육대회, 중앙도민의날 등을 열어 실향의 아픔을 함께 나눴다.
황정달 미수복 도민회 사무국장은 “미수복 도민회는 실향의 아픔을 어루만져주고 함께 나누는 각 지역 주민들의 모임”이라며 “분단이 길어지면서 실향민도 2, 3세대가 지나면서 고향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적어지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신형철·최기영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