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관의 덕목으로 흔히 당사자의 말에 귀 기울여 듣는 '경청의 자세'와 합리적 이유 없이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각'을 꼽는다. 법관이라면 평소 경청의 자세와 균형감각을 강조하는 말은 익히 들어왔을 테지만, 이것을 실천에 옮기고 계속 유지하기란 말처럼 쉽지만은 않은 일 같다. 경청의 자세와 균형감각은 비단 법정에서뿐만 아니라 사건기록을 검토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어떻게 보면 사건기록에는 당사자의 주장과 증거가 훨씬 더 상세하게 담겨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경청과 균형감은 법정에서보다 더욱 필요해 보인다.
사건기록을 검토하다보면 스스로 문득 한쪽 당사자의 주장에만 너무 치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다. 그 결과, 다른 쪽 당사자는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나름대로 많은 주장서면과 증거를 제출하고 있는데, 법관은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그를 외면한 판단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특히 처리해야 할 다른 많은 사건이 있을 때 양쪽 당사자 주장 모두를 꼼꼼하면서도 대등하게 검토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법관이 법률과 양심에 따라 확신을 가지고 내린 결론이라고 하더라도, 당사자들이 치열하게 다투고 특히 패소하는 결론 쪽에 있는 당사자가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여러 주장과 이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들을 제출하고 있다면, 결론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적용된 법률이나 법리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법과 이론에만 치우쳐 상식과 국민의 법감정에 반하는 결론이 내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양쪽 당사자가 치열하게 다투는 사건에서 어느 한쪽 당사자를 패소시키는 결론을 내렸을 경우, 그 패소하는 쪽 당사자의 편에 서서 다시 한 번 사건기록을 검토해 보는 것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오판의 가능성을 줄여주는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패소하는 쪽 당사자의 입장에서 사건기록을 한 번 더 검토해 봄으로써 그 당사자 말대로 패소하는 것이 정말 억울한 결론인지, 그래도 패소하는 것이 타당한 결론인지 한 번 더 체크해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해 보니 패소하는 쪽 당사자의 편에 서서 기록을 다시 보더라도 역시나 그 주장이나 증거들이 결론을 뒤집기에는 미흡한 경우도 있었지만, 좀 전에 봤던 사건기록이 새롭게 보이고 처음과 달리 그 패소하는 쪽 결론의 당사자 주장이 앞뒤가 맞고 오히려 더 타당해 최종 결론을 정한 경우도 있었다. 기록에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사건 뒤에 숨어있는 진상을 한 번 더 생각하고, 정말로 이 당사자가 패소하는 것이 상식에 맞는 결론인지를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경청의 자세와 균형감각'을 항상 유지하겠다는 초심을 그대로 지켜 나가는 게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새삼 느끼고 있지만, 초심을 지켜나간다는 것은 법관의 직무를 수행해나가는 매 순간 그것을 잊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목숨 걸고 재판했다는 어느 선배 법관의 말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겨보면서 이 글을 마친다. “저는 내가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을 버리는 순간 진정한 판사로서의 삶이 시작될 것으로 믿습니다. 내가 목숨 걸고 악착같이 붙들어야 할 것은 그 무엇이 아니라 법정에 있고 기록에 있는 다른 무엇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