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일반

[한민족 4천년 역사에서 결정적인 20장면]강원도 중심으로 세운 첫 국가 후고구려…성급한 왕권 강화로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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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 도성 추측도. ▼궁예 도성 옛터. 철원군청 제공

영월 세달사의 승려 됐다가 891년 환속한 궁예

양길의 휘하에서 신임…명주 일대 확보 후 자립

900년경엔 한강 유역과 소백산맥 이북 장악 완료

철원서 송악 천도 후 901년 즉위 국호 ‘고려' 칭해

905년 철원궁성 완공 환도…국호 ‘마진'으로 고쳐

911년 국호 ‘태봉' 변경…후삼국 일통 의지 드러내

미륵 자처하며 호족 탄압·불교계와 갈등 깊어져

권력 장악 못 한 상태서 대규모 숙청 정변 불러와

918년 6월 태봉(후고구려) 수도 철원에서 송악(개성) 출신 유력 호족이자 정권 2인자인 왕건이 장군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포함 4기장(四騎將) 등을 이끌고 황제 김궁예에게 대항하는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후고구려와 고려는 후고려(발해)에 이어 ‘외왕내제(外王內帝·외국을 상대할 때는 왕, 국내적으로는 황제 호칭)'를 채택했다. 쿠데타 진압에 실패하고, 철원에서 탈출한 김궁예는 명주(강릉) 성주이자 김궁예와 같은 신라 왕족 출신 김순식(왕순식)에게로 도망하다가 철원 인근 부양(평강)에서 왕건이 보낸 추격군에 사로잡혀 시해당한 것으로 추측된다(고려가 편찬한 사서에는 보리이삭을 훔쳐 먹다가 백성들에게 맞아 죽은 것으로 나온다). 그로부터 474년 뒤인 1392년 왕건의 후손들은 왕건이 김궁예에게 한 것과 똑같이 이성계가 주도한 쿠데타를 통해 대거 살해당했다.

# 신라 왕의 서자 출신인 김궁예

9세기 말, 노쇠한 신라는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 갔다. 889년 사벌(상주)에서 원종·애노가 반란을 일으켰다. 원종·애노의 난은 50년 후삼국시대로 가는 방아쇠였다. 신라는 중국 삼국시대, 일본 전국시대와 같은 군웅할거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헌안왕(또는 경문왕)의 서자(庶子) 김궁예 역시 반란의 시대에 몸을 일으킨 군웅(群雄) 중 하나였다. 김궁예는 영월 세달사의 중이 됐다가 891년 환속(還俗), (경기도) 안성의 세력가 기훤 휘하로 들어갔다. 기훤에게 실망한 김궁예는 892년 안성을 떠나 북원경(원주)의 세력가 양길에게 투신했다. 그해 신라의 장군 진훤(견훤·甄萱)이 반란을 일으켜 무진주(광주)를 점령, 세력을 떨쳤다. 진훤은 양길(良吉)에게 비장(裨將) 벼슬을 내리는 등 한반도의 지배자를 자처했다. 한편, 양길의 신임을 획득한 김궁예는 양길로부터 100여명의 병력을 받아 치악산 석남사에 주둔하면서 강원도 남부와 울진, 봉화(내성) 포함 경북 일대를 공략했다. 3,500여 병력을 거느리게 된 김궁예는 894년 대관령을 넘어 계속 진군, 명주(강릉) 일대를 확보했다. 명주의 토호(土豪)이자 무열왕 김춘추의 후손 김순식이 전투 없이 명주성을 넘겨줬다. 세력을 강화한 김궁예는 자립했다. 김궁예는 병력을 재편한 후 속초-고성을 거쳐 향로봉 삼재령을 넘어 서쪽으로 진군, 인제-양구-화천-김화-철원(쇠둘레·쇠벌) 등 강원도 중북부 일대를 장악했다. 896년 김궁예의 부대는 철원에서 개성으로 이어지는 길을 통해 패서(경기 북부와 황해도) 지방으로 계속 진군했다. 분열돼 있던 박지윤, 황보제공, 용건(왕륭) 등 패서 호족들은 연안(延安)의 유긍순 포함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김궁예에게 항복했다. 김궁예는 그해 임진강의 지류 한탄강 유역 내륙도시 철원을 수도로 삼았다가 1년 뒤인 897년 용건의 세력권 안에 위치한 예성강 유역 송악(개성)으로 천도했다. 김궁예는 상당 규모 사병을 거느린 용건의 아들 왕건을 정권 2인자 격으로 중용했다.

# 철원 돌아온 후 자주적 제국 표방

899년 양길은 김궁예의 독자 노선에 분노, 경기와 강원 남부, 충청지역 30여개 성 병력을 동원해 김궁예를 공격하려 했다. 김궁예는 양길에게 선공을 가했다. 김궁예군은 비뇌성(안성) 전투에서 양길군을 대파했다. 비뇌성 전투는 삼국지 조조와 원소 간 ‘관도전투(官渡戰鬪)'에 비견된다. 김궁예는 한강 유역 패권을 장악했다. 김궁예는 900년경 서원경(청주), 중원경(충주) 일대 청길과 신훤 등 양길 잔존 세력을 일소하고, 소백산맥 이북 장악을 완료했다.

김궁예는 901년 송악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라 했다. 한반도 북부 영토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버린 후고려(발해)는 김궁예의 세력 확장을 저지할 수 없었다. 김궁예는 903년 왕건으로 하여금 후백제의 후방인 나주(금성) 지역을 공략하게 했다. 왕건은 오다련 포함 영산강 유역 호족들의 지원을 확보, 후백제로부터 영산강 유역 10여 개 군현을 빼앗았다. 오다련은 후백제의 나주 탈환 공격을 막아내는 데도 도움을 줬다. 당시 바다에 접했던 나주 일대는 서해와 남해 해로(Sea Lane)를 함께 통제하는 해상 교통의 요충이었다. 농업생산력도 상당했다. 후백제의 타격은 컸다. 후고구려는 나주를 발판으로 언제든지 진훤의 초기 거점 무진주 포함 후백제 내륙으로 침투할 수 있게 됐다. 후백제는 929년이 돼서야 나주를 탈환했다가 6년 뒤인 935년 다시 빼앗긴다.

김궁예는 905년 후고려 상경 홀한성(忽汗城)을 모델로 외성 둘레 12㎞, 내성 둘레 7.7㎞의 철원 궁성(남북 군사분계선 기준 정확히 2개로 분단)을 완공했다. 그는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武泰)라 하고 철원으로 환도(還都)했다. 연호를 정했다는 것은 자주적 제국(帝國)을 표방했다는 뜻이다. 김궁예는 국호를 변경해, 전고려(고구려)의 색채를 지우고 패서 일대 전고려계 호족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김궁예는 신라 5소경 중 하나인 서원경(청주) 주민 수천명을 철원으로 이주시키고, 아지태 등 청주 호족들을 적극 등용했다. 전고려의 정체성을 강조하다가는 청주, 충주, 공주, 나주와 같이 백제에 속했던 지역과 신라 영역 주민들로부터 호의적 반응을 이끌어내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 아쉽게 수도로 부적합했던 철원

김궁예는 최초 거병한 890년대부터 계속해서 영토를 확장해 나갔지만, 911년부터는 정복전쟁을 멈추고, 나라를 안정시키는 방향으로 나갔다. 하지만 철원 환도와 이후의 전제 왕권 강화 시도는 철원 백성들을 피폐하게 만들어 김궁예의 몰락을 가속화시켰다. 철원은 바다로부터 멀리 떨어진 데다 철원평야를 흐르는 임진강의 지류 한탄강(漢灘江) 수량이 너무 적어 한 나라의 수도로는 적합하지 못한 곳이다. 한탄강은 고저차가 심하고 물살이 세 수운(水運)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본류 임진강 수운도 일정 구간에서만 가능하다. 김궁예는 곡창인 철원평야를 믿고 철원 환도를 결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철원평야의 생산력만으로는 주민이 크게 늘어난 수도(首都) 철원 경제를 유지할 수 없었다. 한탄강의 적은 수량으로는 폭증한 주민들의 생활용수와 농업용수도 제대로 공급할 수 없었다. 수도는 대부분 큰 강을 끼고 있다. 교통과 산업이 발달한 현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수도 주민들에게 물을 충분히 공급하기 위해서는 큰 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전고려(고구려)의 평양(대동강), 신라의 경주(형산강), 백제의 한성(한강)과 웅진·사비(금강), 후고려(발해)의 상경 홀한성(목단강), 조선의 한양(한강) 등 역대 왕조 수도 모두 큰 강을 끼고 있었다.

물가가 몇백%까지 치솟는 하이퍼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으로 인해 철원 백성들의 생계가 위협받았다. 세포(細布) 1필로 쌀 5~6되밖에 살 수 없게 됐다(무열왕 시기 경주에서는 세포 1필로 쌀 500되 구매 가능). 김궁예가 정치적 이유로 예성강과 바다를 끼고 있는 송악을 포기한 것은 큰 실책이었다. 김궁예는 새 나라를 세우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이상을 실현하는 데는 실패했다. 새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현실 권력인 전고려계 패서 호족(豪族)들의 협조가 절실했다. 그들은 생명과 재산을 보전받기 위해 김궁예에게 협력했지만, 그를 진심으로 따른 것은 아니었다. 김궁예는 애민정신이 강한 지도자였지만, 정치가에게 필요한 인내심, 친화력, 융통성을 갖지 못했다. 황후 강씨(康氏)의 친정 포함 패서 호족들과 불화하고, 귀순해 온 신라인들을 첩자로 의심해 다수 살해한 것이 그 예다. 김궁예는 911년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로 고쳤다. 마진과 함께 태봉도 후삼국을 일통(一統)하겠다는 의지가 남긴 국명이다. 김궁예는 914년 연호를 정개(政開)로 다시 고쳤다. 김궁예의 성급한 왕권 강화책은 큰 부작용을 가져왔다. 김궁예는 미륵을 자처했다. 미륵신앙을 정치로 끌어들인 것은 미륵신앙 본산 법상종(法相宗)과 갈등을 일으키는 결정적 요인이 됐다. 김궁예는 불교 경전을 자작(自作)하기까지 한 자신에게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낸 법상종 지도자 석총을 대낮에 처형하는 등 잔인한 조치까지 취했다. 법상종을 포함한 불교계는 김궁예에게 강한 반감을 갖게 됐다. 김궁예는 왕권 강화책을 반대하던 패서 신천 출신 강 황후를 처형했다. 태자 청광마저 살해했다 한다. 유방(漢),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카마쿠라 바쿠후), 주원장(明), 이방원(조선) 등 창업자(나 창업자에 가까운 인물) 모두 권력을 확고히 하고 난 다음 부하들을 숙청했다. 진훤이라는 강력한 적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국내 권력도 확고히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대규모 숙청을 자행한 것은 어리석다 할 수밖에 없다. 패서의 전고려계 호족들은 김궁예가 조만간 자신들을 제거하거나 권력을 빼앗을 것을 두려워했다. 전선으로 내려가 있던 부대를 대거 동원한 왕건의 군사 쿠데타는 전고려계 패서 호족들이 김궁예에게 선수를 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군사적 재능은 탁월했으나 정치력이 크게 못 미쳤다는 점에서 김궁예는 비슷한 시기를 살다간 사타돌궐 출신 후당(後唐) 장종 이존욱(李存勖)에 비견된다. 왕건 일가는 경기만 일대를 배경으로 한 해상호족이었다. 김궁예와 달리 왕건은 사략선단(해상 겸 해적) 세력을 최대한 활용했다. 첫째 부인의 아버지 유천궁은 예성강 하구 풍덕에서 성장한 국제상인이었다. 둘째 부인의 아버지 오다련은 영산강 유역에 기반을 둔 토호였다. 남양(화성)만의 홍유, 당진의 복지겸과 박술희, 임진강 유역 파평 윤씨(윤관의 조상), 한강 하류 공암(양천) 허씨(허준의 조상), 안양천 금천(衿川) 강씨(강한찬의 조상), 남한강 하류 이천 서씨(서희의 조상) 등 여러 해상·수상 세력이 왕건을 후원했다.

# 김궁예 성취 바탕 후삼국 통일한 왕건

김궁예의 호족 탄압과 불교계 숙청은 기득권층과 기득권 불교계 대상 개혁정치의 일환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김궁예의 조치는 너무 성급하고 정교하지 못했다. 그는 역풍을 맞아 역사의 궤도에서 이탈했다. 하지만 김궁예의 흔적은 오래갔다. 왕건이 즉위한 이후 세워진 전남 강진 무위사 경내 선각대사비는 김궁예를 대왕 전주(大王前主)라고 기록하고 있다. 왕건 정권이 강릉의 김순식이나 공주의 이흔암(伊昕巖) 같은 김궁예 추종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936년 왕건은 김궁예가 성취해 놓은 것을 탈취해 후삼국을 통일했다. 통일의 길을 닦았다는 점에서 김궁예의 역할은 세례 요한이나 진(秦) 시황 영정, 수 문제 보륙여견(양견), 그리고 중화민국 장제스와 비슷하다. 우리 역사상 강원도를 중심으로 세워진 유일한 나라가 후고구려(마진, 태봉)다. 남·북강원도 통합과 한반도 통일을 희구(希求)하는 마음으로 한때 강원도 최대 도시이기도 했던 철원을 수도로 정한 이상주의자 ‘궁예'를 특별히 다룬다.

백범흠 강원도 국제관계대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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