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한민족 4천년 역사에서 결정적인 20장면]서구 열강들 엇갈린 이해관계…대한제국의 멸망 부채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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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서 승리한 일본 조선 언제든 침공할수 있는 조건 확보

1896년 고종 러시아공사관 망명…日 영향력 감소·친러화 성공

조선·만주 놓고 각축 ‘러-일' 1904년 2월 일본의 기습으로 개전

영·미 일본 지원…러시아의 동맹 프랑스는 英과 충돌 원치 않아

‘日' 1905년 5월 대한해협 해전 승전 직후 루스벨트에 중재 의뢰

일제가 조선반도의 관할권 차지…5년 뒤 대한제국 병탄 이어져

# 英·美에게 버림받게 된 조선

청일 전쟁(1894~1895년)에서 승리한 일본은 1895년 4월 미국의 주선으로 체결된 시모노세키조약을 통해 ①조선이 독립국임을 확인하는 한편, ②△랴오둥반도와 △펑후열도를 포함한 타이완과 함께 △전쟁 배상금으로 순은(純銀) 2억냥을 획득했다. 일본은 조선을 국제법적으로 청의 속박에서 완전히 풀려나게 함으로써 언제든 조선을 침공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놓았다. 일본의 랴오둥반도 확보에 놀란 러시아는 조약 체결 직후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을 위협, 랴오둥반도를 반환하게 했다(배상금은 당시 일본 정부의 6년치 예산인 3억냥으로 증액). 청일 전쟁이 끝난 1895(을미)년부터 러일 전쟁이 시작된 1904년까지 조선(대한제국)은 ①영·미와 ②일본, ③러시아 간 세력 균형 아래 ‘무기력한 평화'를 누렸다. 주조(駐朝) 독일공사관 1등서기관이 조선 외무대신대리를 공사관으로 불러 뺨을 때릴 정도였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고종이 파견한 특사 호러스 알렌에게 ‘미국은 일격도 못 날리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일체 지원해 줄 수 없다고 말했다. 루스벨트는 조선 정부와 민족을 세계에서 가장 못난 정부, 못난 민족이라고 평가했다. 중전 민씨 일파는 3국 간섭에 성공한 러시아의 힘을 과신한 나머지 친러 정책을 밀고 나갔다. 이에 대해, 일본은 그해 10월 미우라(三浦梧樓) 주조(駐朝) 공사로 하여금 일본군과 낭인을 동원하고, 친일장교 이주회·이두황·우범선 등을 사주해 민씨를 시해케 했다(을미사변). 민씨가 시해당한 것은 △일본의 모험주의 △일본-러시아 간 갈등 △조선 친일파-친러파 간 갈등 △민씨를 포함한 조선 지도부가 민심을 상실한 것 등이 원인이다. 민씨 시해에 이은 단발령(斷髮令)으로 인해 류인석과 허위(許蔿) 등 산림(山林·재야) 성리학자들을 중심으로 근왕창의(勤王倡義), 척왜(斥倭)를 내건 의병운동이 일어났으나, 곧 진압 당했다. 을미사변 4개월 뒤 국내외적으로 혼란이 지속되던 1896년 2월 친러파 이범진의 계획에 따라 고종은 주조(駐朝) 러시아공사관으로 망명(俄館播遷)했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감소했다. 아관파천은 조선의 필사적 생존책이기는 했지만,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 라이벌 영·미로부터 철저히 버림받게 되는 계기가 됐다. 러시아는 아관파천을 성사시킴으로써 조선을 친러화하는 데 성공했지만, 대규모 병력을 실어 나를 수 있는 시베리아철도가 완성될 때까지는 뤼순-다롄 조차(1898년) 외에는 일본과 타협하는 정책을 취했다. 러시아와 일본이 1896~1898년에 걸쳐 체결한 △베베르·고무라(Waber·小村) 각서(일본군의 조선 주둔 허용) △로바노프·야마가타(Lobanov·山縣) 협정과 △로젠-니시 협정(만주-조선반도 분할)은 러·일 타협의 대표적 사례다. 청일 전쟁에 참전했으며, 총리를 역임하는 천민 출신 장군 야마가타가 1889년 오스트리아 빈(Wien) 체류 시 만난 국가학(Staatswissenschaften) 전공 폰 슈타인 교수는 야마가타에게 공격적 현실주의(Offensive realism)에 입각, 한 나라의 주권선과 이익선 개념에 대해 설명했다. 주권선과 이익선 개념은 일본 외교의 근간이 됐다.

# 日 기습공격으로 전쟁 발발

조선은 러·일이 조선반도와 만주를 놓고 각축하던 1897년 10월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꿨다. 1900년 러시아는 ‘의화단의 난'에 편승, 15만 대군을 파병, 만주 전체 점령을 노렸다. 일본은 러시아에 대항하고자 ①영국과 동맹을 맺는 것과 ②러시아와 협상하는 것을 놓고 고심하다 1902년 1월 ①영일동맹조약 체결로 방향을 잡았다. 일본은 패권국 대영제국의 경제·군사적 영향 아래 들어가는 길을 택함으로써 영·미의 지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러시아는 1902년 러·프 동맹 적용 범위를 동아시아로 확대하려 했지만, 프랑스의 반대에 부딪혔다. 러시아는 1902년 4월 ‘러·청 철군협정'을 체결하는 등 만주에서의 이권 강화 관련 소극적 태도를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만주 주둔군 제1기 철군까지만 이행했을 뿐 제2기 철군 대신, 1903년 4월 추가 파병, 랴오닝성 남부와 지린성 전역을 군사 점령했다. 5월에는 압록강을 건너 용암포까지 점령했다. 러시아가 대외정책을 바꾼 것은 비테와 람스도르프 등 온건파가 영향력을 잃고, 베조브라조프와 플레베를 비롯한 강경파가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와 일본은 1904년 2월 개전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만주와 대한제국 문제를 두고 추가 협상했다. 일본의 주장은 러시아의 만주 우월권은 인정하되 기회균등원칙은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러시아의 만주 독점과 북위 39도선 이북 한반도를 중립지대로 설정하는 등 일본이 군사적으로 한반도를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타협 여지가 사라졌다. 일본은 1904년 1월 개최 어전회의에서 강경책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은 러시아의 답변을 확인하지 않은 채 2월 임시각의에서 전쟁을 결정했다. 1904년 2월6일 큐슈 사세보항을 출항한 도고(東鄕平八郞) 함대가 2월8일 러시아 동아시아 함대 근거지 뤼순항을 기습 공격하면서 러일 전쟁이 시작됐다. 2월9일 일본군은 다른 함선을 동원해 인천 앞바다에 정박한 러시아 군함 2척을 격침했다. 일본은 2월10일에야 정식으로 선전 포고했다. 대한제국은 러일 전쟁 발발 이전인 1904년 1월 전시중립을 선언했지만, 러·일 어느 쪽도 무기력한 대한제국의 입장을 존중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은 대한제국에 반(反)러시아 동맹조약(의정서) 체결을 강요했다. 도고 함대가 뤼순항을 봉쇄하는 데 성공했으며, 4월 말 한반도를 거쳐 북진한 일본군 제1군(구로키 대장)은 5월 초 압록강 하구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했다. 제2군(오쿠 대장, 오가와 중장)은 다롄 중심 난산(南山)을 점령해 러시아군의 동아시아 함대 근거지 뤼순항을 고립시켰다. 블라디보스토크에 기항하던 러시아 동아시아 함대 함선이 6월 대한해협(경남과 큐슈 사이 바다)까지 남하, 일본 육군수송선을 격침했다. 일본은 같은 달 만주 총사령부를 설치했다. 15개 사단으로 이뤄진 만주 주둔 일본군이 9월 랴오양을 점령했다. 사무라이 스타일의 노기 마레스케(나중 타이완 총독 겸 만주군 총참모장 고다마 겐타로로 교체)가 지휘한 제3군은 1905년 1월1일 3만여명 이상이 사상당한 격전 끝에 스테셀 중장이 지휘한 러시아군의 저항을 뿌리치고, 군사요충 뤼순 203고지 일대를 점령했다. 203고지 점령은 뤼순항에 갇혀있던 러시아 동아시아 함대의 종말을 의미했다. 오야마 육군 총사령관이 지휘한 25만 일본군은 그해 3월 알렉세이 크로파트킨 동아시아 총사령관이 지휘한 32만여 러시아군을 선양 전투에서 격파, 육전을 거의 마무리했다. 러시아는 패배를 인정치 않고 북만주-시베리아 경계로 후퇴, 일본군을 시베리아까지 끌어들이고자 했다. 러시아는 주력을 하얼빈에 집결시켜 반격을 노렸다. 하지만 러시아는 그해 1월 발생한 민중반란(피의 일요일) 탓에 전쟁을 지속할 능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영·미는 일본 국채 매수 등 전비(戰費) 측면에서도 일본을 적극 지원했다. 일본은 결정적 승기를 잡은 뒤 미국에 중재를 의뢰하기로 결정했다. 일본 해군은 모항(母港) 라트비아 리바우항을 떠나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오느라 전력이 약해진 발틱 함대와의 대한해협 해전에서 승리했다. 1905년 5월27일 새벽 진해만 그늘에 숨어 기다리던 도고 함대는 24시간 계속된 대한해협 해전에서 정자전술(丁字戰術)을 써 러시아 함대를 격파하고,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을 포로로 잡았다. 러시아를 경멸한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독일과 프랑스가 다시 간섭하고 나설 경우, 즉각 일본 편에 서겠다고 경고했다. 또한 러시아와 일본에 대해서는 전쟁터를 확대하지 말고, 만주를 포함한 중국 영토 불가침 원칙을 지키라고 요구함으로써, 러시아의 만주 기득권을 부정했다. 미국은 만주를 빼앗을 생각까지 했다. 잉커우 포함 랴오허 하구(河口) 등 만주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던 미국은 러일 전쟁 후 일본의 세력 확대를 막기 위해 ‘오렌지 작전'이라는 대일(對日) 군사작전까지 계획한다.

# 美 강권 아래 러·일 강화조약

러시아의 동맹국 프랑스는 영국과 충돌만은 피하고자 했다. 프랑스는 전쟁에 말려들지 않고자 중립을 선언하고 4월8일 영·프 협상(Entente Cordiale)을 체결했지만, 러시아 함대에 석탄을 공급해 주는 등 동맹으로서의 의무는 다했다. 러시아의 진출 방향을 발칸·중동이 아닌 동아시아로 돌리고자 한 독일은 러시아가 ‘동아시아에서 공격받을 시 독일의 지원을 기대해도 좋다'는 뜻을 1903년 7월 이후 여러 차례 암시했다. 하지만 1904년 1월 일본에게 이번 전쟁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통보했으며, 개전과 함께 중립을 표명했다. 영국, 프랑스는 잠재적 적국 독일을 견제하려면 러시아의 군사력이 너무 약해져서는 곤란하다고 봤다. 미국은 일본이 동아시아 강국으로 부상하는 것을 위험시했다. 대한해협 해전 직후 일본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중재를 의뢰했다. 러시아와 일본은 1905년 6월8일과 10일 각각 루스벨트의 제의를 수락했다. 미국은 6월12일 강화를 알선할 것임을 공표했다. 일본은 7월7일 러시아령 사할린섬 점령을 결행해 러시아를 압박했다. 고무라·다카히라(小村·高平)와 비테·로젠이 8월9일~9월5일 미국 대서양 연안 포츠머스에서 진행한 강화교섭은 일본의 12개 제안을 토대로 이뤄졌다. 러·일 양국은 △조선에서 일본 우위(Paramount) △일본의 랴오둥반도 조차(租借) △남만주철도와 지선(支線) 관할 문제에는 쉽게 합의했으나 ①사할린 문제 ②전비 배상 문제 ③중립국에 억류된 러시아 군함 인도 문제 ④러시아의 동아시아 해군력 제한 문제에는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일본은 ①·②를 합쳐 북위 50도 이북 북사할린을 러시아에 돌려주는 대가로 12억엔 어치 순은(純銀)을 내놓으라는 새 요구를 제시했다. 협상이 결렬 위기에 놓이자 일본은 배상금 문제는 철회하고 남사할린 할양만 요구했다. 러·일은 미국의 강권 아래 1905년 9월5일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은 △조선반도 관할권 △뤼순·다롄 조차권 △남만주 철도 부설권 △남사할린 영유권을 획득했다. 루스벨트는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청일 전쟁이 동아시아 지역 전쟁(Regional War)이었다면, 러일 전쟁은 열강 모두의 이해관계가 걸린 그레이트 게임의 일부였다. 러일 전쟁 후 영국의 제1 라이벌은 러시아에서 급속히 해군력을 증강하던 독일로 바뀌었다. 미국의 견제로 일본은 러일 전쟁이 끝난 5년 후인 1910년에야 대한제국을 병탄할 수 있었다. 이완용과 송병준, 이용구(이우필) 등 친일파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 왕국식 합방(合邦)을 기대했으나, 돌아온 것은 식민지화였다. 대한제국 멸망의 최대 책임자는 고종을 필두로 한 왕가와 외척 민씨 일족이다. 그 다음 책임자는 성리학적 철학체계와 세계관에 집착했던 ‘우물 안 개구리' 사대부 엘리트들이다. 1910년 대한제국이라는 나라는 멸망했지만, 조선 왕가는 덴노가(天皇家) 아래 이왕가(李王家)로 살아남았다.

백범흠 한중일 협력사무국 사무차장(연세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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