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충남 서천군 장항에서 납북귀환어부 김성덕(71)씨를 만났을 때 취재진은 이제까지 만났던 납북귀환어부들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들었다. 1969년 납북돼 간첩으로 조작됐던 김씨는 2017년 재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가 겪은 피해와 인생에 깊게 남은 상처는 다른 어부들과 다르지 않게 들렸지만, 그는 '무죄가 나오면 뭣하냐'고 소리 높였다. 지난 세월 죽을만큼 고생했던 것에 비해 제대로 보상을 받지 못했다는 호소였다. 재심과 무죄 판결을 간절히 기다리는 동해안의 납북귀환어부들과 유족들을 주로 만나왔기에 재심으로 무죄를 선고받은 어부들의 삶에서, 희망을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했던 예상은 빗나갔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 억울함을 알려도 달라지는 게 없다며 냉소적으로 인터뷰를 했던 김씨는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야 자신이 운영하는 건강원의 배즙을 건넸다. 도라지가 들어가 씁쓸한 배즙을 받아 마시면서 제대로 된 명예회복, 피해 배·보상과 치유 방안이 마련되지 않은 채 무죄를 선고한다고 해서 어부들의 기나긴 억울함이 순식간에 풀리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쥐꼬리 만한 배상에 억울함만 가중=김성덕씨는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죽을 만큼 고생만 했고 수 십년이 지나 재판에서 무죄를 받았는데 나쁜 것들이 돈을 제대로 줘야 말이지"라며 한탄했다. 그는 "엄청나게 두들겨 맞고, 직장도 못 다니고, 한 사람의 삶이 이 모양 이 꼴이 됐는데 손에 쥔 건 3,000만원이 채 안 됐다"고 했다. 옆에 있던 부인은 "재심 신청한다고 대출 받아서 알아보러 다니고, 서류 값 내고 변호사 선임하고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도리어 빚만 졌다. 생각하기도 싫다. 무죄를 안 받았으면 차라리 빚을 안 졌다. 이렇게 허덕이고 안 산다"고 거들었다. 김성덕씨는 "동해안에도 납북귀환어부 피해자 분들이 많으실 텐데, 돈을 바라보고 재판을 하시려고 생각해서는 안될 거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말하자면, 없던 죄를 쓴 누명에서 벗어난 것 그거 하나뿐이지 고생한 것은 한 푼도 보상받지 못했다"며 "납북돼 피해를 봤던 억울함에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억울함이 더해 화만 남았다"고 말했다.
■처음 바다에 나간 날 납북된 기구함=그가 납북됐던 건 1969년이다. 김성덕씨는 17살의 나이, 조기를 잡던 복순호에 올랐다. 기구한 것은 그가 처음으로 바다로 나섰던 항해에서 납북됐다는 것이었다. 울분을 쏟아냈던 그와 부인은 이 대목을 이야기 하면서야 그나마 소리내 웃었다. 김씨는 "어른들은 고기를 잡았지만 나는 어린 나이 배를 타서 아는 게 없으니 바로 고기를 잡지는 못하고 밥을 지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배를 탄 날 그렇게 된 거다. 안개가 자욱한데, 모두 눈을 붙이고 있는 사이 북한 군인들이 배에 들이닥쳤다"고 회상했다. 그는 그렇게 북한에 3개월 정도 납북돼 있다가 이후 인천항을 거쳐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김씨는 "복순호 뿐 아니라 다른 배들과 함께 돌아왔는데 바로 장항경찰서로 끌려갔다. 우리 더러 어로한계선, 군사분계선을 넘어서 어업을 하면서 북괴가 있는 지역으로 탈출했다는데 어로한계선은 넘지도 않았다. 북에서 잘해주니까 그곳에 남은 어부들도 있지만 나는 고향 생각에 돌아왔는데, 환대를 받다가 왔다면서 불범 감금과 고문을 당했다"며 "일주일 이상 몽둥이찜질을 하고 끔찍한 고문 끝에 기절하면 찬물을 얼굴에 부었고, 또 고춧가루물을 담아 코에 붓고 그렇게 고생을 겪었다. 그 때 생각하면 눈이 빙글빙글 돌고 머리가 지끈지끈하다"고 말을 아꼈다.
■화병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와 형제들의 고통=김씨의 아버지는 40대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김씨는 "내가 북에 납치된 동안 아버지가 형사들에게 미행을 당했다. 형사들이 아들과 연락이 닿지 않느냐며 들들 볶았다더라. 내가 북에서 돌아오고 감옥에 갔다 온지 얼마 되지 않아 곧바로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나 때문이 아니겠나. 내가 2남 3녀 중 제일 큰 아들인데 북에 끌려갔다 왔지, 3개월간 감옥에 있다가 몸이 상해서 나오니 부모가 얼마나 속을 끓였겠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이 삼삼하다. 근데 아버지가 나 때문에 돌아가신 이런 것도 하나도 피해로 보상받지 못했다"고 했다. 형제들도 취직 뿐 아니라 사회적 낙인 속에서 피해를 입었다. 그는 "시집간 여동생은 남편에게 '오빠가 이북 갔다온 간첩'이라며 고통받았고 시댁에서도 힘들게 했다더라. 여동생이 결국 목숨을 끊었는데 다 내 영향 때문이 아니겠나 싶다"고 했다. 그는 또 "나뿐 아니라 형제들도 말하자면 단체 생활을 하나도 못했다. 취직을 하려고 해도 형사들이 뒤를 따라다녔고 어쩌다가 자리를 소개를 받아도 '간첩' 집안이라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사촌 형제들도 피해를 봤는데 재판에서는 통하지 않았다"고 했다.
■"기억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또 너무 한이 된다"= 그는 이대로 가족들이랑 잘 사는 게 꿈이라면서도 순간 순간 터져나오는 화를 참지 못했다. 김씨는 "내가 아무리 간첩이 아니라고 해도 사람들이 간첩으로 알았다. 쉬쉬하면서 숨어 살았다. 직장에 취업도 못하고 배를 타다가 최근에서야 건강원을 운영하고 있다. 재심은 2010년부터 움직이기 시작해서 2017년 겨우 무죄를 받은 것인데, 보상금이 적으니 이제까지 내가 받은 피해를 하나도 인정받지 못한 기분이다. 너무 답답하고 억울해서 다시 소송을 시작해야겠다 싶다가도, 흘러 보낸 예전 기억을 다시 뒤적여 떠올리는 게 너무 힘들다. 괜히 기대를 했다가 실망만 할까봐 어떤 날은 그냥 다 그만두고 싶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는 "몇 개월 납북됐든, 몇 개월 감옥에서 보냈든 그 이후의 피해는 모두 같지 않나. 수 십년을 억울하게 고생한 값이 이것 밖에 안 된다는 게 너무 한이 된다"고 했다.
충남 서천=이현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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