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발언대]내 마음속 냉장고에는 무엇이 들어 있나

이윤숙 헬로프로젝트 제작PD

냉장고만큼 편한 물건도 없다. 여름과 겨울을 가리지 않고 식재료들을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게 해준다. 그렇지만 냉장고 관리를 잘 안하면 그만한 애물단지도 없다. 오랫동안 잊어버려서 악취를 풍기는, 먹다 둔 음식들이 쌓이다 어느 날 결국 냉장고 청소를 하게 된다. 큰맘 먹고 치운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면서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을 받은 경험이 대부분 있을 것이다.

우리 삶에도 냉장고 같은 것이 있다면, 그 안에 무엇이 담겨 있을까? 장애인 창작공연예술 워크숍 ‘나는야 연기왕’ 글짓기 시간, 김봄 작가가 참가자들에게 물었다. 한참을 곰곰이 생각에 잠긴 참가자들이 오랫동안 ‘보관’만 하고 돌보지 못했던, 마음속 꽁꽁 싸매어 둔 생각을 들춰보기 시작했다.

A의 냉장고에는 ‘카레’가 있었다. “어머니가 뭘 해주시겠다고 하면 고민을 하다 결국은 ‘카레’라고 이야기를 해요. 어느 날은 속상한 일이 있어 카레를 안 먹은 적이 있어요. 그때 어머니가 엄청나게 심각하게 왜 카레를 안 먹는지 물으셨어요. 제가 실수를 해도 크게 안 놀라셨는데 카레를 안 먹으니 어머니가 크게 놀라셨던 거죠.”

카레를 왜 좋아하는지 묻는 질문에 그는 “카레와 같은 향신료에는 호불호가 있을 것 같아요. 저는 모든 이에게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받지 못하지만 적어도 ‘카레’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성숙한 대답이었다. A는 시각 장애를 가진 청년인데, 속내가 깊었다. 머릿속에서 생각의 지도를 정리해서 이야기를 잘했다. A의 다른 칸에는 ‘평등’이라는 단어도 있었다. 장애를 가진 청년이 비장애인 위주로 구성된 사회에 살면서 겪는 불평등이 많았으리라 짐작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내 예상을 조금 빗나갔다.

“시설에 살고 있다 보니 저보다 심한 장애를 가진 친구들을 많이 봤어요. 저는 단순 시각장애가 있었기에 주변 사람들을 많이 도와줬는데 장애 때문에 무언가를 못한다는 것이 슬펐고, 자신이 할 수 있음에도 말없이 기다리는 모습이 마음 아팠어요.”

A는 다른 장애인을 보면서 어떤 이들이 스스로 포기한 ‘평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고 했다. 주어진 환경에 자포자기하고 수동적인 삶을 살아가기를 선택하는 것은 ‘불평등’을 자초하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듣고 나니 A에게 ‘평등’은 이제 막 냉장고에 넣었지만 금방 상해 버려서 ‘불평등’이 될 것 같은 위태로운 단어였다.

‘평등’은 부모로부터 독립하고 사회 일원이 되려고 하는 이 시대 청년들의 비슷한 고민이 아닐까 싶다. 내가 태어난 가정 환경은 스스로 정할 수 없는 일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선택지는 얼마든지 있다. 그런 선택지가 청년들 앞에 고르게 제시되고 있는 사회인가? 우리 사회는 얼마나 ‘신선한 평등’을 제공하고 있을까?

워크숍 참가자들은 냉장고 비우기를 했다. A는 ‘평등’이라는 단어를 아직은 먹지 못하는 것, 숙성돼 제 맛을 내기를 기다려야 하는 단어라고 말했다. A는 이 단어를 빼고 나머지 단어를 청소했다. 냉장고 안은 깨끗하게 비워졌고, 앞으로 시간을 두고 숙성해야 할 단어들은 보관됐다. 여러분의 냉장고에는 무엇을 비우고 남길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연초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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