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정도 눈에 익기는 했지만 여행자의 도시 타멜의 좁은 길들은 여전히 미로 같았다. 길눈이 어두운 걸까. 일행들은 아무렇지 않게 상점들을 구경하며 인파 속을 헤쳐 나가는데 내 걸음은 자꾸 뒤처졌다. 홀로 떨어져 골목의 작은 신전에 한눈을 팔다가 갈림길에 도착하면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사방을 기웃거리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저 멀리 인파 속에서 일행 중 한 사람이 사거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내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렇게 골목들과 북적거리는 시장을 통과해 카트만두 더르바르 스퀘어(궁정광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힌두교 사원들과 옛 궁정, 그리고 불교 사원들이 모여 있는 광장은 변함없이 무엇인가로 꽉 차 있는 곳이었다. 광장 외곽에서 사람들을 먼저 반기는 곳은 사나운 얼굴 형상을 한 시바신의 아바타라는 스베타 바이라바(Sveta bhairava)와 깔라 바이라바(Kala bhairava)다. 미리 밝히자면 수많은 신이 살고 있다는 네팔에서 신들과 그 아바타들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은 타멜의 골목들을 익히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차라리 네팔의 음식과 술 이름을 외우는 게 더 낫다고 고집하는 편이다. 현지인들은 그 온갖 신의 이름을 알고 있을까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의 이런 불평에는 아랑곳없이 사람들은 크든 작든 신전을 지나칠 때마다 촛불과 꽃 등등을 바치고 기도하는 푸자(Puja)의식을 멈추지 않았다. 신들의 이름보다는 사실 그게 더 신기했다. 이 자본주의 세상에서 저들은 무슨 연유로 신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일까. 신들은 어떤 위안을 주는 것일까. 언제까지 신들을 버리지 않고 저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런 회의감을 떨칠 수 없었기에 우리들의 가이드인 심 교수에게 물었는데 예상과는 다른 답이 돌아왔다. 변화야 조금 있겠지만 신들을 버리지 않을 거라고.
지난 시간을 가로질러 온 듯한 비둘기 떼는 여전히 광장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발을 내딛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십 년 전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당선되고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곳곳에서 어지럽게 울려 퍼질 때 처음 이곳에 왔고 힌두사원의 그늘에 앉아 흰 사자 두 마리가 지키고 있는 쿠마리의 집 대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삼 년 전 이곳에 앉아 있을 때는 중국에서 첫 코로나 감염자가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고 아무도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가 유행할 거라는 짐작을 하지 못했다. 그때도 비둘기들은 일제히 날개를 퍼덕이며 사원의 지붕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깃털과 먼지를 날리며 광장으로 내려앉곤 했다. 겨울임에도 햇살은 한여름처럼 뜨거웠다. 그리고 삼 년 후 우리들은 코로나의 열기가 다소 가라앉자 다시 의기투합해 카트만두 궁정광장을 찾아와 흰 사자의 꼬불꼬불한 돌 갈기를 쓰다듬고 있는 중이었다. 풍경은 변하지 않았다. 술에 취해 잠든 돌계단 위 맨발의 사내, 사원의 처마 아래에서 낮잠을 즐기다 깨어나 하품을 하는 개, 막대사탕을 물고 사원 마루에 앉아 있는 남루한 옷차림의 어린 형제, 마달(작은북)과 싱잉볼(구리사발 모양의 악기), 사랑기(현악기)를 사라고 권유하는 상인들... 겨울 아지랑이가 일렁거리고 오래된 시간이 소용돌이치는 풍경 속에서 현기증을 느낄 무렵 마침내 쿠마리의 집 나무문이 열렸다.

세 번째 보는, 살아 있는 여신이라는(그럼 다른 신들은 모두 죽었다는 얘긴가...) 쿠마리는 삼층의 창을 통해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가 곧 사라졌다. 사진촬영은 금지였다. 십 년 전, 삼 년 전의 그 여신일까. 아니면 그 사이에 바뀐 걸까. 어린 여신은 입을 열지 않았다. 짙게 화장을 한 탓인지 조금 무서웠고 무표정에 가까웠다. 그중 커다란 두 눈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쿠마리를 둘러싼 무수한 이야기가 피어나는 사각의 정원이었다.
힌두교 고대 여신들의 화신이며 18세기 중반부터 쿠마리를 선정했다는 이야기. 까다로운 선발 절차에 관한 이야기. 발을 땅에 딛지 않고 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이야기. 초경이 시작되면 일반인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적응이 쉽지 않다는 이야기. 네팔에는 총 11명의 쿠마리가 있는데 그중 이곳의 쿠마리가 로열 쿠마리라는 이야기. 파탄(카트만두 근처의 도시)의 어느 쿠마리는 초경이 오지 않아 30여년을 쿠마리로 살았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네팔 왕자가 1984년 강제로 은퇴시켰다는 이야기. 그 왕자는 2001년 네팔 왕궁의 총기 사건의 당사자이며 현장에서 자살했다는 이야기. 그때 쫓겨난 쿠마리는 세속에서 아직도 쿠마리로 살고 있다는 이야기. 쿠마리를 지낸 여성과 결혼하면 삶이 불행해진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신과 인간의 세계를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이기에 나올 법한 이야기들이었다. 저 많은 이야기 중에 나도 하나 보탤 게 있다. 푼힐(해발 3,210m) 트레킹 도중 산골짜기 개울 옆 자그마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그 집의 상호가 쿠마리식당이었다. 그곳을 떠나 산길을 걷던 중 등에 자기 덩치보다 커다란 나뭇단을 지고 내려오는 할머니를 가리키며 저 이가 식당의 주인이며 전직 쿠마리라고 포터가 알려주었다. 한때 신이었던 그녀의 구부러진 뒷모습을 나는 오래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 역시 왠지 낯설지 않았다.
카트만두 궁정광장에는 19세기까지 왕족이 거주하던 궁이 있는데 현지인들은 보통 하누만 도카(Hanuman dhoka)라 부른다. 입구의 문 옆에 자리한 원숭이 수호신인 하누만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이 궁 안의 광장에서는 아직도 나라의 주요 행사가 열리고 있는데 우리가 찾아갔을 때도 어떤 행사가 있는지 녹색으로 칠한 긴 나무 봉을 든 군인들이 도열해 있었다. 원숭이 신은 빨간 망토를 걸치고 우산을 쓴 채 입구를 지키고 있는데 신기한 점은 빨간 점토 같은 걸로 입만 빼놓고 나머지 얼굴을 모두 덮어씌웠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건너편 자간나트(크리슈나신의 대표적 화신) 사원 외부에 장식된 성적인 조각상들(미투나상)을 못 보게 하려는 의도라고 한다. 뒤돌아보니 과연 그러했다. 사원에 이런 조각상들을 왜 설치한 것일까.

인간과 신의 신비적인 합일을 위해 고안되었을 거라 학자들은 말하며 이보다 더 잘 우주를 이해시킬 방법은 없다 여긴 것 같다고 전한다. 네팔의 미투나상들이 인도의 것들과 다른 점은 돌이 아니라 나무로 조각했다는 것이다. 까닭이야 어찌되었든 원숭이 신도 보지 못하게 눈을 가려버린 미투나상들을 올려다보며 떠오른 생각은 이렇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원숭이신의 눈까지 억지로 가린 것은 너무한 게 아닌가. 그게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행사가 끝나자 우리는 하누만궁으로 들어섰다. 박물관으로 변한 왕궁들, 사원과 사원, 광장과 또 다른 광장이 여러 개의 문과 구부러진 통로를 거쳐 미로처럼 이어졌다. 벽에 들어가 있는 뱀신(상반신은 여자, 하체는 뱀인 나기니)의 몸통은 길고 길었다. 그 길 끝에 돌계단 형태의 마른 저수지가 있고 돌기둥 위에 올라앉은 청동뱀은 긴 혀를 내밀고 있었다. 뱀이 내 몸을 친친 감고 있는 듯 어지러웠다. 목이 말랐다. 당장 밖으로 나가 저잣거리에서 시원한 맥주 한 잔 마시고 싶었다. 그런데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 지나온 길이 떠오르지 않았다. 온갖 신의 거처에 꼼짝없이 갇혀버린 듯했다. 지난 시절 왕이 타던 자동차마저 시동이 꺼져버린 지 오래였다.
광장의 비둘기들은 여전히 꾸꾸루꾸꾸 노래하며 신전 앞의 촛불들을 흔들고 코뚜레와 목사리가 없는 소와 개들은 되새김질을 하거나 모로 누워 잠을 잤다. 상인들은 그늘 한 점 없는 광장에 골동품 같지 않은 골동품들을 펼쳐 놓은 채 손님을 기다렸고 그 뒤편 구멍가게 앞에선 티베트 승려들이 짜이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건물 귀퉁이 손바닥만 한 그늘 속에 앉아 십 년 전과 거의 비슷한 풍경을 바라보다가 문득 고개를 치켜드니 하늘에 가느다란 낮달이 희미하게 떠 있었다. 달은 저기 있고 광장은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곳인데 내가 찾는 그 나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