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조선왕조실록·의궤 톺아보기]“극한의 상황에 홀연히 나타나 제주백성을 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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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열전 (2) 김만덕(中)
정조 19년 기근으로 아사자가 늘면서 인구 1만여명 이상 감소
김만덕 재산을 풀고, 제때 쌀이 도착할 수 있게 해 구휼에 힘써

◇객주를 통해 거상이 된 만덕과 구휼활동. 2000년 김만덕 일대기 공모사업 선정된 강부언 화백 작품. 출처=김만덕 재단

조선왕조실록 등 역사사료들을 살펴보면 정조 19년(1795년)을 전후로 제주(탐라)의 기근은 상당히 심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가 제주의 진휼(賑恤·흉년을 당하여 가난한 백성을 도와줌)에 관한 일로 하교한 내용에는 당시 상황과 함께 임금이 느낀 자책, 안타까움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지난해 진휼(賑恤)하면서 있는 힘과 정성을 다했는데도 보고해 온 바에 따르면 굶어 죽은 사람을 헤아리기 어렵다고 한다. 모두가 나의 죄이고 나의 탓이라 하겠지만 마음은 허탈해지고 슬퍼지기만 한다. 그런데 지금 수신(守臣·변방을 지키는 신하)의 장계를 보건대 농사가 또 흉년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하니 섬 백성들을 생각하면 차라리 아무 말도 하고 싶지가 않다. 그들을 구제해 줄 방도를 서둘러 강구하고 늦춰서는 안될 것이다.(정조실록 43권, 정조 19년 10월 2일)”

이에 앞서 정조는 정리소의 돈 1만 냥을 전라도 관찰사에게 떼어 준 뒤 편리한 대로 곡식으로 바꿔 탐라로 보내 진휼하는 데 도움을 주도록 했다.(정조실록 42권, 정조 19년 2월 14일) 하지만 이와 같은 응급조치도 큰 실효를 얻지는 못한 것이다. 게다가 며칠 후 곡식을 싣고 제주로 향하던 배가 침몰하는 사건(※ 상편 참조)까지 발생했으니 임금은 망연자실할 수 밖에 없었다. 정조는 왕실의 자금(내탕전)까지 풀어 제주에 곡식을 내려보내는 등 백성들을 구해내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정조실록 44권, 정조 20년 1월 3일) 당시의 인명피해 수준까지 실록은 상세히 다루고 있다. 1794년 겨울 제주의 3개 읍에서 조사한 굶주린 인구수( 6만 2,698명)와 1795년 조사한 굶주린 인구수(4만 7,735명)의 격차가 무려 1만 7,963명(1만4,963명의 오기로 보임)에 달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조정은 이를 백성들이 사망한 숫자로 판단 한 것이다. (정조실록 44권, 정조 20년 1월 15일)

아사(餓死)로 인한 1만 명 이상의 인구 감소가 불과 1년여 만에 벌어진 일인 점을 감안하면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때 홀연히 나타난 것이 김만덕이었다. 그는 제주 백성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내놓는다. 재산 가운데 천금(千金)을 덜어 내 육지에서 쌀을 구입했고, 이를 실은 사공들의 배가 제때 제주에 도착하게 했다. 곡식의 대부분은 백성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관아로 보내진다. 이 소식을 듣게 된 굶주린 백성들은 관아 뜰에 구름같이 모여 들었고, 곡식을 받아든 이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를 살린 사람은 만덕”이라며 만덕을 칭송했다.(만덕전 중)

진휼이 모두 마무리된 후 제주목사는 이 내용을 정조에게 보고하고, 이를 기특하게 여긴 정조는 만덕에게 상을 주려고 한다. 이에 만덕은 정중하게 사양한다. 대신 바다를 건너 상경한 후 금강산 유람을 하게 해달라고 요청한다.(정조실록 45권, 정조 20년 11월 25일)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풀어야 할 또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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