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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신년특집 신춘문예]묘전:무덤전쟁희곡 - 희곡 송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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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정심 : 조강지처, 기종 모(母)

귀순 : 첩, 기종의 친모

덕이 : 식모

기종 : 장남

무대

장례식장. 빈소.

1.

장례식장. 빈소.

세상 평화로워 보이는 할아버지 영정 사진.

그 앞에 상복을 입은 세 할머니.

정심, 귀순 그리고 덕이.

정심 (향에 불을 붙여 꽂으며) 이제 올 사람들 다 다녀갔나 보네. 애들은 집으로 갔나?

덕이 (장례식장 정리를 하며) 예, 기종이는 꼬박 이틀 잠도 못자고 오늘은 술도 좀 마셔서 피곤한지 안에서 자고, 다른 애들은 씻고 눈 좀 붙이고 새벽에 온다고 집으로 가고... 우리 애들은 근처 호텔로 갔어요.

정심 호텔? 집 놔두고 왜?

귀순 안 불편하겄소? 8남매에 딸린 식구들까지 하믄 서른 명은 될 것인디, 덕이네 애들까지 가믄 누울 데가 있간디. 씻는 것도 불편하고. 애들끼리 친하도 안하고...

정심 그래도 형제지간에 이럴 때 좀 같이 있고 하지.

귀순 아이고, 저라고 모르는 소리를 해싸. 아부지 살아있을 때나 그것들이 형제지간이지 돌아가시고 나믄 이복끼리 보고 산당가?

정심 남도 아니고... 아버지 제사 때 한 번씩 보고 그럴 텐데.

귀순 성님, 나도 (영정 사진을 카리키며) 저 양반 죽은 덕에 몇 년 만에 덕이랑 덕이네 애들 얼굴 봤지... 애들은 길에서 봐도 모르겄습디다. (상복 치마를 걷어 올리고 반쯤 누워있는 거만한 자세로) 아따, 인자 나도 다리 좀 뻗자. 자식새끼들이 많응께 급사를 해도 문상 온 손님들이 솔찬하네이~ 부조도 솔찬하고~ 결혼식은 부모 손님, 장례식은 자식 손님이라고, 아이고, 새끼들 많이 낳기를 잘했네 나가.

덕이 (청소를 하다 귀순의 말을 듣고 정심의 눈치를 본다)

정심 많이 와봤자 농사철도 아닌데 농사짓는 애들이 부조를 하면 얼마나 한다고.

귀순 누가 을매나 냈는가 부조금 봉투 열어봤소? 서울서 산다고 여그 솔찬히 무시하네이. 여그가 뭐 아직도 그라고 시골인 줄 아요? 여그 산다고 다 농사만 짓고 사는 줄 안갑네이. 기주 친구들 다 농협 댕기고, 군청 댕기고, 지서 댕기고, 면사무소 댕기고 그래요. 비닐하우스 농사짓고 하는 애들도 서울에서 회사댕기는 놈들보다 잘 버는 애들 많고.

정심 기성이 친구들은 와서 술 마시고 화투 치고 떠들다가만 갔지 뭐.

귀순 음마? 본래 상갓집이 술도 마시고 화투도 치고 시끌시끌하고 북적북적하고 그러는 것이지, 뭐가 그라고 다 불만이다요?

정심 자식 농사 잘 지어서 문상객이 많았던 게 아니고, 기종이 아버지가 감투 쓴 게 많아서 기종이 아버지 아는 양반들이 자식들 데리고 온 거야. 근데 그게 기주, 기성이 동창들인 거고. 그리고 밖에 화환들, 그거 다 서울에서 기종이 대학이랑 회사에서 보내온 거잖아. 봉투만 보내온 것들도 그렇고. 화환이랑 봉투에 써진 거 안 봤나보네. 아, 자네 아직 글 못 읽든가?

귀순 (시퍼렇게 날이 서서) 기종이는 뭐 성님이 낳았소?

덕이 (귀순에게) 형님!

정심 (귀순을 말없이 노려본다)

귀순 어려서 핵교 쪼깐 댕겼다고 옛날부터 사람을 그라고 무시를 하든만 나가 여직 까막눈인지 아는갑네이. 손주들이랑 문자도 하는 사람이요 나가. (덕이에게) 덕아, 니도 문자 할 줄 아냐?

덕이 (계속 청소를 하며) 저는 카카오톡도 하고 영통도 해요.

귀순 뭐라 그냐. 영어 했냐 시방?

정심 다행이네. 다 끝나면 집으로 우편물도 가고 그럴 텐데.

귀순 뭔 우편물?

정심 편지 같은 거.

귀순 걱정하지 마씨오. 편지도 잘 읽고 편지 써서 우체국 가서 부칠 줄도 알고 은행 가서 돈 부칠 줄도 앙께.

정심 (계속 청소하고 있는 덕이에게) 집도 아니고, 더 올 사람도 없을 것 같은데, 뭘 그렇게 열심히야. 자네도 좀 쉬어. 이틀 동안 음식 나르고 하느라 고생했는데.

귀순 개 버릇 남 주겄소? 쓸고 닦고 하던 것이 본래 지 일잉께 그라제. (덕이에게) 덕아, 인자 그만하고 뭐 좀 내와 봐라. 우리도 뭐 좀 묵자.

덕이 네! (주방 쪽으로 가서 접시에 이것저것 담는다)

정심 (귀순에게) 자네가 갖다 먹어. (덕이에게) 기홍 엄마, 이리 와. 먹고 싶은 사람이 갖다 먹게.

덕이 (음식을 내오며) 아이고, 아니에요. 이게 편해요 저도. 가만히 못 앉아있겠어요. 드세요들. 제대로 끼니도 못 챙겨 드셨을 텐데.

귀순 (시장했는지, 음식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먹기 시작한다)

정심 (이런 귀순을 한심하게 쳐다보며) 덕이가 자네 수발들러 온 사람이야? 그리고 덕아, 덕아, 이름 좀 부르지 마. 애들 엄마고, 할머닌데, 내가 자네한테 귀순아, 귀순아 할까? 어떻게 자네는 나이를 먹어도 그렇게 체신머리가 없을까 몰라. 삼시 세끼 한 끼를 안 거르고 육개장에 밥 한 그릇씩 뚝딱하고, 오며 가며 주전부리에...

귀순 아따, 이 성님 오늘 날 잡았는갑네. 나를 왜 그라고 못 잡아 묵어서 난리래.

정심 어떻게 자네는 영감이 급사를 했는데 장례식 내내 그렇게 천하태평이야?

귀순 아니, 글믄 서방 죽은 년은 쫄쫄 굶어 감시롱 질질 짜고만 있어야 된다 그말이요? 성님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든만.

정심 나하고야 한 이불 덮은 세월 고작 3년이지만, 자네는 50년 넘게 한 이불 덮고 산 세월이 있는데, 심지어 옆에 누워 같이 자던 사람이 갑작스레 그렇게 갔는데, 뭐가 그리 좋아서 장례식에서 웃고 있냔 말야.

귀순 음마? 성님. 을매나 좋소. 아파서 골골거리다 간 것도 아니고, 자다가, 잉? 푹 자다가, 잉? 그라고 쭉- 잠든 것인디, 을매나 좋아. 그것이 최고 복 받은 일 아니요? 세상 편하게 살다가 갈 때도 편하게 가고, 호상도, 호상도, 그런 호상이 없제. 어디가 아파서 고생을 했어, 병원비가 들기를 했어. 자식새끼들이랑 마누라한테 병수발 시키기를 했어. 나가 차려준 저녁밥 잘 자시고, 테레비 연속극이랑 뉴스 잘 보시고, 마루에 있는 요강에다가 오줌 잘 누시고, 그라고 잘 주무시다가 잘 가신 것인디. 나는 부럽기만 하구만.

정심 (할아버지 영정사진으로 다가가 향을 하나 새로 피우면서) 아이고, 영감. 저것이 50년 넘게 당신이 끼고 산 당신 마누라요.

사이.

정심 (귀순과 덕이 쪽으로 다시 다가와 앉으며 둘을 번갈아가며 쳐다본다) 내일 발인 전에 자네들한테 긴히 할 말이 있는데...

덕이 네, 형님!

정심 (말을 잇지 못하고 한참을 머뭇거린다)

귀순 사람 불안하게 뭘 이라고 뜸을 들여싸까. 성질 급한 년은 넘어가겄네, 얼른 말 하쑈.

정심 자네들도 알겠지만... 내가 서울로 간 게... 기종이 우리 집 장손이고, 장손이면 우리 집 기둥인데, 기종이는 서울에서 공부시키고 싶어서 내가 어린 기종이 데리고 서울로 올라간 거잖아.

귀순 여그서도 기종이 젖떼기가 무섭게 나한테 뺏어가서 품에 안고 싸고돌다가 서울까지 데려가서 성님 새끼 만든 거 모르는 사람이 있간디? 다른 새끼들은 다 성님한테 큰엄마라고 해도 기종이는 성님한테 엄마, 나한테 작은 엄마 안 그요.

정심 왜? 억울해?

귀순 억울하단 것이 아니라 성님이 기종이 키운 것은 인정을 한다 그 말이지.

정심 기종이 대학 갈 때까지만 있자고 한 게, 대학 졸업할 때까지만, 직장 들어갈 때까지만, 장가 갈 때까지만... 그러다 장가가서 애 낳으니까 손주 눈에 밟혀서 또 못 오고... 그렇게 40년을 있었네.

귀순 모르는 얘기도 아니고 갑자기 그런 얘긴 왜 해쌌소?

정심 나 이제 여기 내려와서 살려고.

귀순 뭔 소리요, 그게?

덕이 큰 형님 여기 내려와서 사신다는 말씀이신 거 같은데요?

귀순 (덕이에게 버럭 화를 내며) 누가 그것을 몰라? (정심에게) 아니 성님은 여그보다 서울서 산 세월이 더 긴디 여기 와서 살겄소? 아는 사람도 없는디? 무슨 낙으로?

정심 자네 안 있는가.

귀순 음마? 죽을 때 됐소? 다 늙어서 농사를 지을 것도 아니고. 물질을 할 것도 아니고. 여그서 뭘 해서 묵고 살라고.

정심 파도 심고, 고추도 심고, 상추도 심고... 자네가 도와주면 텃밭 농사정도는 짓겠지.

귀순 서울에 집도 있고, 기종이 그것은 친엄마인 나보다 성님한테 더 극진항께 기종이 집에서 살아도 되고...

정심 늙어서 자식한테 짐 되기 싫어. 아버지도 돌아가신 마당에 기종이도 결국엔 친엄마 챙기지... 여기 집 많이 낡았던데, 서울 집 팔아서 여기 집도 좀 고치고, 기종이네 집도 넓혀주고.

귀순 여그 집? 아니, 시방 나보고 나가라 그 말이요?

정심 무슨 소리야. 자네가 어딜 나가.

귀순 성님 여그 내려와서 살던 집 고쳐서 살믄 난 어디서 살고.

정심 같이 살면 되지.

귀순 예? 아니 서방도 죽고 없는 마당에 마누라 둘이 같이 살자 그 말이요?

정심 뭐 어때. 서방 살아있을 때도 20년 넘게 같이 살았는데.

덕이 어머, 형님. 옛날부터 형님 신여성인 건 알았지만 너무 멋있으시다. 서울 할머닌 다르네요. 너무 재밌겠는데요, 형님? 저도 이참에 여기 내려와서 형님들이랑 같이 살까요? 내가 형님들 밥해드릴게. 내 손맛 아시잖아요.

귀순 염병하고 자빠졌네. 덕이 니는 식모살이 지겹도 안하냐? 일단 니는 좀 빠져있어 봐야.

정심 좋든 싫든 어차피 선산 문중묘 기종이 아버지 옆이 내 묏자리일 텐데, 서울에 있다가 관에 실려 와서 여기 묻히느니, 여기 땅 밟고 살다 묻히는 게...

귀순 (화들짝 놀라며) 잠깐만요. 시방 쫌 전에 뭐라 그랬소?

정심 응? 여기 내려와 산다고.

귀순 아니, 그거 말고. 성님 묫자리 ‘묏자리’가 맞는 표현이나, 귀순과 덕이는 ‘묫자리’라고 하겠다.

가 어디라고요?

정심 어디긴 어디야. 기종이 아버지 옆자리지.

귀순 어찌케 거기가 성님 자리가 된단 말이요? 법으로 정해놨소?

정심 이 사람아, 내가 법적으로 돌아가신 영감 조강지처 아닌가? 호적상으로도 부부고, 자네 애들 8남매에 덕이네 형제까지 10남매가 다 내 아들, 내 딸로 돼있는데, 거기가 내 묏자리인 게 이상한가?

귀순 아니, 성님 여그 묻히면 기종이가 성님 제사 때마다 여그 내려와야 되고...

정심 제사야 서울에서 지내도 되고, 굳이 안 지내도 되고. 장손이라 어차피 일 년에 여섯 번은 여기 내려와야 되는데, 그 때 그냥 겸사겸사 내 무덤도 한 번씩 들여다보면 되지, 어디 딴 데 묻히는 게 더 번거롭잖아. 아니, 근데, 거기가 내 묏자리인 게 왜?

귀순 아니, 성님, 갑자기 내려와 살겠다는 것도 시방 어이가 없는디, 거기 그 자리에 성님이 눕겠다고 하면 안 되는 거 아니요?

정심 뭐가 안 된다는 거야? 그럼 자네가 거기 눕겠다고 하는 건 말이 되고?

귀순 안 될 건 또 뭐요?

정심 문중묘에 첩들 무덤 있는 거 봤어?

귀순 성님, 나요... 다들 나한테 첩, 첩 그래쌌는디, 이 집안 10남매 중에 8남매를 낳은 것도 나고, 장남을 낳은 것도 나고, 노망 난 시어머니 벽에 칠해 논 똥 치운 것도 나요. 50년 넘게 깐깐한 기종 아부지랑 한 이불 덮고 삼시롱 비우 맞춘 것도 난디... 이정도 했으믄 인자 첩이라 글믄 안 되지... 죽기 전에 꼭 성님이랑 호적 정리하고 나 입적해서 내가 낳은 내 새끼들 호적상으로도 내새끼로 만들어주고 간다고 약속을 했는디... 그라고 주무시다가 가블고... 허허... 인자 호적상으로는 남편도 없고 자식 하나 없는 독거노인으로 죽겄네... 그거 아요? 몇 년 전부터 나라에서 나 불쌍하다고 달마다 따박따박 돈을 줍디다.

정심 말은 바로 해야지. 그게 나라에서 불쌍하다고 주는 거야? 호적상, 서류상으로는 부양가족 없는 독거노인이고 수입도 없으니까 눈 먼 나랏돈 받아먹는 거지. 그거 기주 친구가 면사무소에 있어서 받게 해준 거잖아. 실은 남편도 있고, 집도 있고, 8남매가 용돈도 주는데, 나라에서도 돈을 주고. 얼마나 좋아? 나야말로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고, 실제로는 독거노인인데, 나를 부양할 가족이 호적상, 서류상으로 너무 많다네? 그래서 난 수급자 신청이 안 된대. 누가 진짜 불쌍한 거야?

귀순 평생을 호적상으로 대우 못 받고 없는 사람맹키로 살았는디 50년 넘게 나란히 누워있던 서방 옆에 죽어서 눕지도 못한단 말이요?

정심 나야말로 50년 넘게 같이 못 누워본 서방 옆에 죽어서도 못 눕는단 말이야?

살아생전 50년 넘게 내 자리 뺏고 그만큼 같이 한 이불 덮고 누워 잤음 됐지 죽어서까지 그 옆에 누워있겠다고? 자네 해도 해도 너무 한 거 아닌가?

귀순 뺏긴 누가 뺏어요. 그게 나가 뺏은 거요? 나라고 그 어린 나이에 조강지처 있는 서방 첩실로 들어가고 싶었겄소? 없는 집 딸이 있는 집에 아들만 하나 낳아주고 돈이라도 챙겨서 나올라 그랬든만 딸만 넷을 내리 낳을 줄 난들 알았겄냔 말이요.

정심 시집 와서 1년 동안 애가 안 생기는데, 고작 1년인데도 손이 귀한 집이라 초조해지더라고.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니까 점점 시집살이는 심해지고... 그 땐 뭐 누구한테 이상 있는 건지 알 방법이나 있나, 남자가 계집질을 하든, 여자가 서방질을 하든 해봐야 알지. 어머님이, ‘그저 되나 안 되나만 보는 거다. 한 번 해보고 안 되면 바로 내보내고, 돼도 애만 받고 내 보낼 거다.’ 그러시길래 시집살이보다는 낫겠다 싶어 그러자고 했지. 근데 자네가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입덧을 하기 시작하더니 배가 불러오고 정확히 열 달 만에 애를 낳았네? 근데 딸이야. 어머니가 내 손을 붙잡고 하나만 더 낳아보게 하자, 하나만 더 낳아보게 하자... 나한테 문제가 있다는 게 명확해졌으니 싫다고도 못하고 그렇게 딸 넷을 낳도록 나가기는커녕 점점 더 자네가 안주인이 돼가더라고?

귀순 성님 애 못 낳는다고 3년 시집살이 당한 거? 딸만 넷 낳는 7년 동안 당한 시집살이에 비하믄 그건 암껏도 아니요. ‘임신은 잘 됭께 하나만 더 가져보자 아가, 하나만 더 가져보자 아가.’ 하시는데, 그만두고 나간다 한들 아들도 못 낳아줬는디 돈을 뭐 을매나 주겄소. 나이는 찼지, 애를 넷이나 낳은 년이 시집이나 갈 수 있겄소? 꾹꾹 참고 다섯째를 가졌든만... 이전에 넷 뱄을 때랑은 배 모양부터 다른 것이 틀림없이 아들인디... 이번엔 틀림없이 아들인디... 시상에... 나보다 덕이 야 배가 먼저 불러오네?

덕이 형님들...

귀순 넌 좀 빠지라고 안 하냐.

정심 첩도 모자라 집에서 일하던 어린 식모까지 애를 뱄는데, 말 한마디 못하는 내 속이 오죽했을지 생각이나 해봤어? 거기다 둘이 이틀 차이로 아들을 낳았어. 난 첩이랑 식모한테 미역국 끓여다 바치고 있었고.

덕이 형님들...

귀순 형님들 시방 진지하게 대화중인 거 안 보이냐?

덕이 저도 이참에 할 얘긴 해야겠어요.

귀순 니가 뭔 할 얘기가 있어.

정심 그래, 기홍 엄마가 얘기해봐. 누가 영감 옆에 눕는 게 맞겠어?

덕이 ...

정심과 귀순, 덕이의 대답을 기다린다.

덕이 ...

귀순 아, 할 얘긴 해야겄담서!

덕이 ...저요.

정심, 귀순 뭐?

덕이 저요.

귀순 니가 기종이 아부지 옆에 눕겄다고?

덕이 기종이 아부지 아니고 기홍이 아부지 옆에 눕겠다구요. 형님들 말씀 들어보니까 저도 거기 누울 자격 있는 거 같아서요.

귀순 귀신 신나락 까묵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니 미쳤냐.

덕이 조금 전에 형님 입으로도 말씀하셨잖아요. 제 배가 먼저 불러왔다고.

귀순 그것이 뭐.

덕이 실은 기홍이가... 이집 장남인 거잖아요.

귀순 넌 또 뭔 자다가 봉창을 두들기냐

덕이 맞잖아요. 제가 먼저 입덧하고, 제 배가 먼저 불러왔어요.

귀순 나도 첫째 때는 입덧도 하고 그랬어. 다섯짼디 뭔 입덧을 하겄냐. 글고 기종이 쬐깐하게 태어난 거 모르냐. 애가 뱃속에서도 쬐깐항께 배가 안 부른거제.

덕이 그 때... 기홍이 아부지... 형님보다 저랑 먼저 했어요.

귀순 뭣을?... 아... 거시기를 너랑 먼저 했다? 덕아, 니가 뭘 잘 모르는 거 같은디... 나는 기종이 아부지랑... 맨날 했어, 맨날...

덕이 ...

귀순 글고 기종이가 기홍이보다 이틀 먼저 태어난 거 모르냐?

덕이 그야 형님이 조산하신 거고...

귀순 뭔 조산이여, 조산은! 조산이든 뭐든, 어쨌든 먼저 안 나왔냐. 쌍둥이도 본래는 뱃속에 늦게 생긴 애가 먼저 나온다 글든만. 그래도 먼저 대가리 내민 놈을 형이라고 안하냐.

덕이 어떻게든 먼저 낳으시려고 맨날 걸어다니시고 뛰어다니시고 쪼그려 앉아계시고 쪼그려서 뛰시고 별 짓 다하셨잖아요.

정심 그리고 보니까 기종이 가졌을 때 배 불러오고부터 아궁이 앞에서 쪼그려 앉아서 뛰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네.

귀순 음마? 누가 들으믄 진짠 줄 알겄네. 그거야 애가 똑바로 안 들어서고 암만해도 머리가 밑에 있는 것 같지가 않응께 뛰어도 보고 그랬겄지 애 빨리 나오라고 그랬겄소? 글고 애가 열 달 못 채우고 나오기도 하고 열 달을 넘기고 나오기도 하고 그러는 것이제... 이틀 차이로 기홍이가 장남 못 된 것이 퍽이나 억울했는갑네이.

덕이 형님이 저 애 떨어지게 할려고 했던 것도 알아요.

귀순 음마? 이년이 하다하다 인자는 생사람을 잡네.

덕이 형님이 애 많이 낳아보셔서 잘 안다고 임산부한테 좋은 음식들 많이 알려주시고 챙겨주시고 그랬잖아요. 근데 꼭 형님이 음식 챙겨준 날마다 배가 아프고 그랬거든요? 나중에 들어보면 절대 먹으면 안 되는 음식들이었더라구요.

귀순 야가 야가 오늘 실성을 했는갑네. 재가(再嫁)하겠다고 기어나가서 생전 코빼기도 안 비치다가 기종이 아부지 죽었당께 나타나서는... 그라고봉께 니가 상복을 왜 입었냐? 니가 상복을 왜 입어!

덕이 그때 재가한다고 나간 거 아니고요, 제가 아들 하나 더 낳고 큰형님 기종이 데리고 서울 올라가고부터 형님이 저랑 기홍이를 하도 못 살게 굴어서 제가 어머님이랑 기홍 아부지 졸라서 내보내달라고 했어요. 그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기홍 아부지 두 집 살림한 거 모르시죠?

귀순 뭐?

정심 (영정사진을 바라보며) 대단한 양반이다 아주.

덕이 어머님도 기홍 아부지도 기홍이가 장남 맞다고 해주셨고, 돌아가실 때, 기홍이, 기종이랑 똑같이 주고 가신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갑자기... 그러니까 이 집안 장남 낳은 저, 상복 입을 자격도, 기홍 아부지 옆에 누울 자격도 있는 거 아니에요?

정심 왜 자네까지 이래. 어쨌든 둘은 영감이랑 한 이불 덮고 잔 세월도 길고, 자식들도 낳았고, 그 자식들이 돌봐도 줄 거고, 죽어서도 챙겨줄 거 아닌가? 아무 것도 못 갖은 내가 고작 그 무덤 하나 갖는 게, 그렇게도 안 될 일이야?

귀순 형님이 아무 것도 못 갖긴 뭣을 못 갖어요. 나나 덕이는 재산은 단 한 푼도 못 갖을 것인디, 형님은 재산도 받고 여기 내려와 살기도 한담서. 장남도 뺏어가고, 무덤도 갖겠다믄 성님이야말로 진짜 다 뺏어가는 거 아니요?

정심 애초에 내 자린데 누가 누구한테 뺏어. (덕이에게) 영감이 기종이 몫이랑 똑같이 준다고 했다며. 그럼 내 몫을 기홍이한테 줄게. 기홍 엄마는 그걸 바랬던 거 아냐?

귀순 아따, 이 양반 보소? 시방 돈으로 사람 매수한당가?

덕이 예? 저는 재산 이런 거는 이제 관심 없고, 그보다도 문중묘 기홍 아부지 옆에 눕고 싶어요.

정심 왜들 이러는 거야, 진짜. 길 가는 사람들 붙잡고 물어봐. 애를 낳았든 못 낳았든 조강지처가 버젓이 있는데, 조강지처가 눕는 게 당연한 거지.

귀순 뭘 당연해요, 당연하기를. 말이 조강지처지. 그 뭣이냐... 사실혼...? 배운 양반이 그런 것도 못 들어봤어요? 사실혼적으로다가 나가 조강지처일 수도 있는 것이지. 이 동네 사람들 나가 기종 아부지 마누란 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디. 내 묘가 아니라 성님 묘가 거깄으믄 그것을 더 이상하게 생각하지.

덕이 기홍 아부지가 저한테 늘상 하시던 말씀이 우리 집에 오면 제일 집 같고 가족 같다고. 늘그막에는 저랑 살다가 갔으면 좋겠다고... 그러셨거든요? 근데 못 그러셨으니 죽어서라도 제가 옆에 있어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점점 언성이 높아지자 빈소 옆 방에서 자고 있던 기종이 나온다.

기종 안 주무시고 뭐 하셔들. 아부지 앞에서 지금 싸워요? 묏자리 얘기하는 거 같던데, 아부지 묏자리가 왜.

정심 마침 잘 나왔다. 기종이 이리 좀 와봐라.

기종, 세 할머니 곁에 앉는다.

정심 낼 장지가 선산 문중묘 맞지?

기종 네.

정심 아버지 묻을 자리 옆이 누구 묏자리니?

기종 네?

귀순 느그 큰엄니가 글쎄, 자기가 법적으로도 마누라고 족보상으로도 자기가 이 집안 사람잉께 당연히 그 자리는 자기 자리라고, 우리 같은 첩이랑 식모는 그 자리를 꿈도 꾸지 말라는디, 장남 생각은 어떻당가.

정심 나는 원칙을 얘기한 거지. (기종에게) 기종아, 문중묘에 첩들이랑 나란히 같이 묻혀있는 조상님들 계시니?

귀순 첩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딸 다섯에 아들 셋, 그 중에 장남까지 나가 낳았고, 성님은 애도 없이 기종 아부지랑 50년 넘게 내외하고 지냈는디, 사실혼적으로다가 나를 조강지처로 보는 것이 맞는 것이지, 안 그라냐? 이거 어찌케 법적으로 바로 잡을 방법이 없다냐?

덕이 장남을 형님이 낳지는 않았죠. 형님이 낳은 애를 어거지로 장남을 만든 거지. 엄연히 기홍이가 이 집 장남인 게 맞는 건데...

기종 이건 무슨 소리에요?

귀순 응, 미친 개 짓는 소리. 그 얘긴 아까 진작 안 끝났냐!

덕이 어머님도, 기홍 아부지도 그렇다고 했고, 돌아가시기 전에 남은 여생은 우리랑 살기로 했었으니까 유지를 따라서 저를 그 자리에 눕게 해주는 게...

귀순 식모살이 하던 게 먼저 아들 낳을 뻔한 것도 부화가 치미는디, 니가 지금 묫자릴 넘봐야?

정심 (귀순에게) 자네가 먼저 내 묏자릴 넘보니까 기홍 엄마까지 저러는 거 아냐.

귀순 나가 뭐 넘 보믄 안 되는 것을 넘 봤소?

기종 아, 그만들 좀 해요!

일동 침묵.

기종 이렇게 밤새 시끄럽게 엄마들끼리 싸워봐야 결판 안나요. 묫자리 정해주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귀순 그래? 그런 법은 없냐? 그럼 문중 어르신들한테 결판을 내달라고 허까?

기종 먼저 관속에 들어가실 양반들이 뭔 결판을 내줘요, 내주기를. 엄마들 묻히는 거 보지도 못할 양반들인데. 아니, 엄마들! 아버지 삼일장도 아직 안 끝나고 묏자리 아직 파지도 않았어요. 왜 지금 엄마들 묏자리를 갖고 싸워요, 싸우기를.

정심 죽는 순서대로 들어가자!

일동 예?

귀순 누울 자리가 탐나믄 빨리 뒤져라? 그 말이요 시방? 나이 많다고 먼저 가실 거 같소. 가는 데 순서가 있당가요. 아니 성님은 묫자리 땜시 빨리 죽고잡소?

덕이 그래도 제가 한참 젊은데... 순서대로는 좀...

귀순 너는 좀 빠지라고!

기종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딨어요. 막말로 엄마들끼리 싸워서 누가 아부지 옆에 묻힐지 결판이 난다고 해도, 아니, (정심을 보고) 엄마가 먼저 죽는다고 해도 장례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치러주는 건데, 산 사람들이 거기다 안 묻어주면 그만인 거지.

덕이 어? 그러네? 그럼 제일 늦게 죽어야겠네.

기종 막내 엄마 죽고 나랑 기홍이랑 막내 엄마 묏자리 두고 싸워야겠소?

덕이 싸우긴 왜 싸워. 그땐 니네 엄마 둘 다 이미 다른데 묻혔을 텐데.

기종 아니, 엄마들, 생각을 해봐요. 죽고 나면 자식들이 땅에 묻는지, 화장을 하는지 알아요? 묻혀서 썩는지, 태워져서 가루가 되는지 죽은 사람이 그걸 아냐고!

일동 침묵.

기종 산에다 갖다 묻어놓고 벌초 한번 안 해도 모를 거고, 납골당에 모셔놓고 생전 안 찾아가도 모를 거고, 뼛가루를 어디 산이나 바다에 뿌려도 모를 거라고! 무덤 싹 다 파해쳐서 이장하고 선산을 팔아도 모를 거라고! 근데 묏자리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해요!

덕이 듣고 보니 기종이 말이 맞네요, 형님들. 우리 그냥 셋 다 영감 옆에 묻어달라고 합시다! 큰형님도 내려와 사신다는데, 우리 여기서 셋이 같이 살다가 다 같이 선산에 묻어달라 합시다.

정심 선산이 뭐 묻어달라면 묻어주는데야? 문중에서 그걸 허락할 줄 알아? 안 그래도 자리 없어서 조상들 묘 합장해야 되게 생겼는데, 첩에 식모까지 잘도 묻어주겠다.

기종 엄마들, 세 분 중에 오늘 내일 하시 분 있어요? 내가 봤을 때는 제일 나이 많은 엄마도 10년은 더 사실 거 같은데, 10년이 뭐야. 20년도 더 사시겠는데...

귀순 성님이 100살도 넘게 산다고?

기종 아직 사실 날도 긴데, 사는 걸 걱정해야지, 당장 죽는 것도 아니고, 아니, 당장 죽는다고 해도 죽고 나서 어디 묻히는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해요? 나는 솔직히 이해가 안 가요. 묏자리 욕심, 수의 욕심, 관 욕심, 비석 욕심...

정심 그래, 영감 아직 땅 속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누구 하나 오늘 내일 하면 다시 얘기하자.

귀순 기종 아버지가 누굴 먼저 데려가실랑가.

덕이 꿈에 나타나서 저한테 옆에 와서 누우라고 하지 않을까요?

귀순 지랄 염벙 쌈싸먹는 소리하고 자빠졌네.

서서히 암전.

종소리.

상여소리.

곡소리.

점점 커지다 한참동안 무대를 채우고 점점 작아진다.

2.

다시 조명 들어오면,

2년 후,

뒷벽에 야외, 거리 풍경 지나가고 공원.

잔뜩 꾸미고 나온 세 할머니 그리고 기종 등장.

정심 어딜 가는 거야? 어디 가는지 알려주지도 않고.

기종 우리 엄마들 내가 맛있는 것 좀 사드리고 싶어서요. 세 분이서 같이 나들이도 좀 하시라고.

귀순 아따, 나 성님이랑 식성 안 맞는디... 따로 사주지.

덕이 뭘 나까지 챙기느라고.

기종 막내 엄마도 우리 애들 친손주처럼 대해주시잖아요.

덕이 그야, 니네 애들이 워낙 이쁘고 살갑게 구니까 그렇지.

기종 세분이서 사시는 거는 어때요? 살만해요?

귀순 성님이랑 덕이랑 편먹고 나 왕따 시켜싸서 못 살 것다 참말로.

정심 무슨 소리야? 첩끼리 연합해서 나 애 없다고 괄시하면서.

귀순 첩! 첩! 첩! 그 소리 좀 하지말라고 나가 몇 번을 말하요.

덕이 이렇게 맨날 티격태격하는데, 재밌어.

기종 아휴! 우리 엄마들 누가 보면 친자매들인 줄 알겠어. 사진 하나 찍을까요? 저기 한 번 서보세요. 내가 이쁘게 찍어드릴게.

정심, 귀순, 덕이, 못 이기는 척 포즈를 취한다.

옥신각신, 자리싸움...

찰칵.

퇴장.

암전.

Epilogue.

다시 조명 들어오면,

뒷벽에 납골당 이미지.

세 할머니 그리고 기종 등장.

정심 여길 왜 왔어?

덕이 엄청 잘 돼있는 공원인지 알았더니 안에 납골당이 있네.

귀순 아따, 좋네~ 우리도 그냥 이런 데다 넣어달라 그라까.

기종 그런 생각 하실 줄 알고... 비어있는 네 칸(위층에 한 칸, 아래층에 세 칸이다)을 가리키며, 짠~ 여기가 이 지역 납골당 중에서는 최고급 납골당인데, 제가 어렵게 분양 받았습니다. 층도 로얄층으로다가.

정심 응? 우리 다 여기 들어가라고? 왜? 선산 있잖아. 그리고 왜 네 칸이나 돼?

기종 문중에서... 선산에 묏자리도 없고 자연재해 있을 때마다 관리하기도 어렵다고, 개발해서 공원 조성하고 한다고 30대 조상 묘까지는 싹 이장해가지고 평장으로 합장해서 비석 세운다고 하고, 31대 묘부터는 가족들이 원하면 이장해서 납골당에 안치해도 된다 하드라구요. 그래서 아버지도 이리로 모셔오고, 나중에 엄마들도 여기서 아버지랑 같이 계심 좋잖아요.

정심 자리가 어떻게 되는 거야?

기종 같은 층에 나란히 하면 또 엄마들끼리 아버지 옆자리 갖고 싸우실 거고, 그렇다고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을 수도 있고, 위층에 아버지 모시고 그 바로 아래층에 엄마들끼리 나란히... 어때요, 좋죠. 어떻게 할까요? 왼쪽부터 나란히 순서대로 하실까?

정심 내가 너희 아버지 바로 밑에 가운데 자리로 들어가야지. 자네들이 내 양 옆으로 들어가고.

귀순 아따, 성님, 그것이 또 뭔 소리다요. 기종이 말대로 그냥 첫째, 둘째, 셋째 순서대로 들어가면 되겠구만.

덕이 제가 기홍 아버지랑 위 아래로 붙어있음 안될까요?

사이.

정심 죽는 순서대로 들어가자!

기종 아, 엄마, 또!

정심, 귀순, 덕이, 셋이 동시에 자기가 원하는 자리와 이유를 2년 전 장례식때와 똑같이 말한다. 서로의 말소리 겹쳐지면서 싸우는 소리 fade out.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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